한국 경제의 중흥기에 왕성한 활동을 하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명예회장님'들.대부분 80~90세의 고령으로 골프치고,건강 돌보며 한가로운 은퇴생활을 보낼 것이란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한창 때 산업계를 호령하던 그룹 총수들답게 나이 들어서도 '노는 법'이 다르다. 젊은 시절 일에 빠졌듯,노년기 자신의 삶을 즐기는 데도 그들에게는 남다른 '열정'이 있다.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78)은 두산베어스 홈경기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잠실야구장의 홈팀 임원석을 찾는다.

연간 67회의 홈경기를 빠뜨리지 않고 관람하는 야구 마니아다. 경동고 재학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야구사랑은 60년이 넘었다. 지금도 일본의 유명 야구 주간지 '슈칸 베이스보루' 등을 탐독하면서 국내는 물론 미국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의 이름을 두루 꿰고 유명 선수들의 경우 타율,방어율도 줄줄이 외울 정도라고 한다.

두산베어스 야구단 관계자는 "선수들 타격 폼이나 구질만 보고도 단박에 컨디션을 알아채는 감독 수준 이상의 눈썰미를 지니고 있다"고 전했다.

2008년 두산팀이 목표 타율 2할7푼을 달성하자 1군은 물론 2군까지 코칭스태프 13명 전원에게 골프채를 선물한 에피소드도 있다.

'부전자전'으로 장남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48)도 틈나는 대로 잠실야구장 중앙본부석을 찾는다. 박 회장은 지난해 야구단 구단주을 맡으면서 김경문 감독(상무급)의 차를 그랜저에서 두산이 수입 · 판매하는 혼다 어코드 3.5로 바꿔줄 정도로 야구단에 애정을 갖고 있다.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91)은 9000여권의 책을 소장한 독서광이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삼양식품 본사의 집무실 역시 창문을 빼곤 전 벽면이 책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러나 단순히 책 읽기만 즐기는 게 아니다.

책을 읽다 젊은 직장인에게 소개해 줄 만한 경영 관련 메시지나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교훈 등을 발견하면 이를 발췌하고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책을 펴낸다.

이렇게 만든 책들이 '경영실록' '독취록' '인격과 교육' 등 10여권에 달한다. 자신의 호를 따 설립한 '이건(以建)식품문화재단'을 통해 편당 5000부 정도를 찍어 공공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에 무료로 배포해 오고 있다.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88)의 인생 후반부를 이끌어 주는 원동력은 그림이다. 50대 중반 늦깎이로 그림을 배워 30여년째 취미로 삼고 있는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2~3번씩 서울 무교동 코오롱 빌딩 17층 집무실 옆 화실에 들러 작업을 한다. 대기업 총수로 3번이나 개인전을 연 사람은 흔치 않다.

가장 최근의 전시회는 지난해 '우정(牛汀 · 이 명예회장의 호),자연에서 숨은 그림을 찾다'를 주제로 열린 미수(米壽)전.

자신의 주요 테마인 꽃과 산수를 소재 삼아 그린 작품 88점을 걸었다. 이 명예회장의 집안에는 '미술가의 DNA'가 잠복해 있는 것 같다. 그의 막내동생 미향씨(허영인 SPC 회장의 부인)와 장녀 경숙씨(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셋째 며느리)는 홍익대와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또 미수전에는 외아들인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부부와 맏손자인 규호 씨 등 가족의 헌정작 12점도 같이 소개됐다. 이 회장의 작품명은 부친 이 명예회장 내외 사이에서 1남5녀가 난 것을 가리키듯 '1+1=6'이었다. 이 명예회장이 연례행사로 빠뜨리지 않는 것 중 하나는 매년 천안 우정힐스CC에서 열리는 KPGA 한국오픈에서의 시타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85)은 잘 알려진 대로 자신이 세운 충남 천안 연암대 농장에 머물며 버섯 재배와 함께 된장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어머님의 손맛이 담긴 고향 된장맛'에 대한 향수가 그를 전원생활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든 전통음식은 '수향식품'을 통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지하 1층 매장과 GS수퍼 일부 매장 등에서 판매된다.

윤성민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