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의 강기봉 사장(51 · 사진)은 5월19일을 평생 잊지 못할 날로 꼽고 있다. 회사가 노조파업에 맞서 93일째 직장폐쇄 중인 상황에서 일반 조합원의 절대다수(95.2%)가 강경투쟁만 고집하는 노조집행부를 투표로 쫓아낸 날이기 때문이다. 노조집행부의 문제점을 아무리 얘기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던 일반 조합원들이 뒤늦게나마 강경투쟁과 파업의 파괴성에 눈을 뜨고 금속노조 소속인 노조집행부를 거부한 것은 강 사장에겐 기적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투표 다음 날인 20일 경주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장기 노사분쟁의 흔적인 듯 그의 사무실에는 베개와 이불이 그대로 있었다.

그는 "지난 1년2개월간 오로지 회사가 '강성노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노조와 전쟁을 벌였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량한 조합원들의'쿠데타'로 회사 정상화의 희망이 싹텄지만 그 역시 파업과 직장폐쇄의 후유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했다.

강 사장은 "모든 것이 해결된 게 아니라 이제 겨우 8부능선을 넘어섰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 사장은 지난해 3월 이 회사 대표로 취임하는 순간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대개 취임 첫날 노사 간에 덕담이 오가는 게 상식이지만 강 사장은 '출근거부 투쟁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는 노조간부의 말을 인사말로 들어야 했다.

조합원 605명의 경주 발레오공장은 금속노조 경주지부 산하의 최강성 노조답게 노조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회사 내 비정규직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경비원도 노조에 가입했고 이들의 연평균 임금은 7000만원을 웃돌 정도였다. 직원들의 임금은 물론 관련 업계의 최고 수준이었다. 임금 수준이 이런데도 노조는 해마다 파업을 벌였다. 당시 회사는 2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발레오 본사는 경주공장 직원 중 최소 50여명을 구조조정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회사 지시를 거부했다. 노조와 한국적 직장문화를 아는 현지인 사장으로서 인력을 자르는 구조조정보다 관리직의 임금을 10% 반납하고 원가절감에 초점을 맞추는 개선을 택했다. 강 사장은 또 다른 기업들처럼 청소와 경비,운전직을 외주화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이 길어지자 강 사장은 직장폐쇄 조치를 내리고 비조합원과 관리직원들을 생산라인에 투입했다. 그러자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생산인력이 파업 전의 절반 수준이었는데도 제품 불량률이 낮아지고,생산량이 20%나 늘어났다. 매출도 3월 339억원,4월 352억원으로 증가했다. 공장이 이렇게 잘 돌아가자 일반 조합원들이 파업 위주의 금속노조 투쟁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이 95%의 찬성으로 노조 집행부를 거부할지 몰랐다"는 그는 "선량한 직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장을 화기애애한 산업현장으로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경주=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