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굶주리는 거리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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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주변 낙엽 치우기 경솔
'도시청결' 자연 거슬러선 안돼
'도시청결' 자연 거슬러선 안돼
사람들은 언제부터 길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을까. 고대 로마와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긴 해도 아무래도 본격적이었던 때는 중세 이후인 듯하다. 유럽의 중세 도시엔 가로수가 없거나,있다고 해도 뒤늦게 심은 것이어서, 역시 뒤늦게 생긴 인도(人道)와 자리를 나누어 갖느라 옹색하게 서 있다.
자연이 자연으로 '발견'된 것이 18세기 이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이 있기 전엔 알프스라는 것은 단지 교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루소의 <<고백록>>을 읽고서야 사람들은 스위스로 몰려들었고 비로소 '등산'이 시작됐다.
극복과 이용의 대상이었던 자연이 '자연'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초대된 뒤로 나무나 식물들은 화초 혹은 가로수라는 명칭을 얻었다. 크게든 작게든 아파트 베란다와 도시의 가로에는 나무가 있다. 그러나 내 집안의 화분이 아닌 도로의 나무들은 오늘도 굶주림에 시달린다.
길을 걷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연두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비닐봉지에 뭔가를 열심히 그러담고 있었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를 잇는 회양목 발치의 젖은 낙엽들을 정성스레 긁어냈다. 구청의 지시라는데,이유를 물으니 더러워서 치운다고 대답했다.
젖어 썩어가는 낙엽은 식물에겐 밥이나 마찬가지다. 식물들은 빗물과 낙엽을 빼앗기지 않으려 필사적이다. 고사리의 일종인 관중과 파초일엽이라는 식물의 생김새만 봐도 식물들이 물기와 양분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진화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숲의 나무를 캐다 거리에 심고,물 한 방울 스며들지 못하도록 주위를 시멘트와 보도블록으로 덮는다. 발목마다 육중한 철제 주물로 차꼬를 채운다. 그것도 모자라 어쩌다 바람에 불려와 쌓인 낙엽마저 빗자루로 쓸어내거나 집게로 일일이 집어낸다. 깨끗한 도시와 청결한 거리를 위해.
사실 도심의 자연, 즉 가로수나 공원이라는 것도 그 면적의 몇십 몇백배에 이르는 개발훼손의 대가인 셈이고 보면,조성과 관리는 지나치게 알량한 편이다. 그러한데도 깨끗한 도시와 청결한 거리를 위해 나무들이 굶으며 서 있어야 한다면 '자연의 발견과 초대'는 무색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를 알지 못할 때 명자와 탱자 같은 생울타리 대신 시멘트벽이 생기며,개울가에는 숲띠가 사라지고 옹벽과 돌망태가 평정한다. 둠벙(웅덩이)과 늪지가 메워져 용지(用地)가 된다.
서울의 잡답(雜沓)을 피해 산과 들이 보이는 곳에 집필실을 마련한 지 올해로 14년째다. 매년 이맘때면 온 마을이 거름냄새로 진동한다. 그러기를 140년도 넘었을 일이라 마을 사람들은 그 냄새로 밭갈기철이 돌아왔음을 안다. 비로소 생산을 위한 힘찬 기지개가 시작되는 계절.이곳에 터를 잡고 산 사람들은 그 냄새와 함께 올 농사의 풍요를 기원한다. 그것이 곡식을 키우고,사람을 키우고,마침내 마을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알므로,애나 어른이나 코를 움켜쥐지 않는다.
신록이 세상을 덮고 있다. 모든 새순의 처음 색깔은 연둣빛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수종에 따라 색깔의 농도가 달라지며 저마다 제 이름대로 짙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처럼 그들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거리의 가로수들도 부디 그렇게 짙어지기를,양분을 앗겨 더 이상 잎을 틔우지 못하거나 누렇게 마르는 일이 없기를.
집필실 인근 마을에 대한 대규모 개발계획이 2년 전에 발표됐다. 터잡기 공사와 도로 공사는 이미 끝이 났다. 거름냄새가 구수하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까지야 다 헤아릴 수 없지만,어쩌면 곧 그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14년 동안 주민세를 내온 주민으로서 섭섭한 마음 없을 리 없다.
구효서 < 소설가 >
자연이 자연으로 '발견'된 것이 18세기 이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이 있기 전엔 알프스라는 것은 단지 교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루소의 <<고백록>>을 읽고서야 사람들은 스위스로 몰려들었고 비로소 '등산'이 시작됐다.
극복과 이용의 대상이었던 자연이 '자연'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초대된 뒤로 나무나 식물들은 화초 혹은 가로수라는 명칭을 얻었다. 크게든 작게든 아파트 베란다와 도시의 가로에는 나무가 있다. 그러나 내 집안의 화분이 아닌 도로의 나무들은 오늘도 굶주림에 시달린다.
길을 걷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연두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비닐봉지에 뭔가를 열심히 그러담고 있었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를 잇는 회양목 발치의 젖은 낙엽들을 정성스레 긁어냈다. 구청의 지시라는데,이유를 물으니 더러워서 치운다고 대답했다.
젖어 썩어가는 낙엽은 식물에겐 밥이나 마찬가지다. 식물들은 빗물과 낙엽을 빼앗기지 않으려 필사적이다. 고사리의 일종인 관중과 파초일엽이라는 식물의 생김새만 봐도 식물들이 물기와 양분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진화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숲의 나무를 캐다 거리에 심고,물 한 방울 스며들지 못하도록 주위를 시멘트와 보도블록으로 덮는다. 발목마다 육중한 철제 주물로 차꼬를 채운다. 그것도 모자라 어쩌다 바람에 불려와 쌓인 낙엽마저 빗자루로 쓸어내거나 집게로 일일이 집어낸다. 깨끗한 도시와 청결한 거리를 위해.
사실 도심의 자연, 즉 가로수나 공원이라는 것도 그 면적의 몇십 몇백배에 이르는 개발훼손의 대가인 셈이고 보면,조성과 관리는 지나치게 알량한 편이다. 그러한데도 깨끗한 도시와 청결한 거리를 위해 나무들이 굶으며 서 있어야 한다면 '자연의 발견과 초대'는 무색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를 알지 못할 때 명자와 탱자 같은 생울타리 대신 시멘트벽이 생기며,개울가에는 숲띠가 사라지고 옹벽과 돌망태가 평정한다. 둠벙(웅덩이)과 늪지가 메워져 용지(用地)가 된다.
서울의 잡답(雜沓)을 피해 산과 들이 보이는 곳에 집필실을 마련한 지 올해로 14년째다. 매년 이맘때면 온 마을이 거름냄새로 진동한다. 그러기를 140년도 넘었을 일이라 마을 사람들은 그 냄새로 밭갈기철이 돌아왔음을 안다. 비로소 생산을 위한 힘찬 기지개가 시작되는 계절.이곳에 터를 잡고 산 사람들은 그 냄새와 함께 올 농사의 풍요를 기원한다. 그것이 곡식을 키우고,사람을 키우고,마침내 마을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알므로,애나 어른이나 코를 움켜쥐지 않는다.
신록이 세상을 덮고 있다. 모든 새순의 처음 색깔은 연둣빛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수종에 따라 색깔의 농도가 달라지며 저마다 제 이름대로 짙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처럼 그들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거리의 가로수들도 부디 그렇게 짙어지기를,양분을 앗겨 더 이상 잎을 틔우지 못하거나 누렇게 마르는 일이 없기를.
집필실 인근 마을에 대한 대규모 개발계획이 2년 전에 발표됐다. 터잡기 공사와 도로 공사는 이미 끝이 났다. 거름냄새가 구수하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까지야 다 헤아릴 수 없지만,어쩌면 곧 그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14년 동안 주민세를 내온 주민으로서 섭섭한 마음 없을 리 없다.
구효서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