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공개된 국내 자동차 메이커 4월 실적의 키워드는 '기아자동차'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내수와 수출이 각각 32.8%와 53.8% 늘어나는 성과를 거둔 것.'1위 타이틀' 농사도 풍년이었다. 쏘렌토R,K7,모닝,프라이드 등 4개 차급에서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중대형 세단 K7은 3856대가 팔려 이 부문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그랜저를 제쳤다. 1~4월 전체로 봐도 K7의 판매량(1만7265대)이 그랜저(1만5875대)를 앞선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동굴에서 뛰쳐나온 곰'

신차 스포티지R는 출고 1주일 만에 4626대가 팔리며 4779대가 팔린 투싼ix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최근 출시한 중형 세단 K5도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아직 본격 출고 전이지만 계약대수가 1만4000대를 넘어섰다. 지금 주문하면 3개월을 기다려야 차를 받을 수 있다.

기아차의 최근 상황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지난 1분기에는 분기 기준 사상 최대 규모인 3098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기아차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올 들어 신차를 잇따라 출시하면서 매출이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실적이 뛰자 시장에서의 평가도 달라졌다. "곰이 동굴에서 마늘을 먹다가 사람이 됐다"(고태봉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말까지 나온다. 주가 역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지난해 초 6000원대였던 주가가 외국인들의 집중 매수로 3만원을 넘나드는 수준까지 높아졌다. 대기업의 주가가 1년여 만에 6배 상승한 것은 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증권사들이 제시하고 있는 기아차의 목표주가는 4만원 내외다. 추가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이형실 솔로몬증권 애널리스트는 "스포티지R와 K5가 각각 북미에 첫선을 보이는 시기가 8월과 10월"이라며 "이미 신차 공개가 끝난 국내에서는 하반기 판매량이 다소 줄어들 수 있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매출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의 성장사(史)는 롤러코스터를 연상시킨다. 수차례 위기가 지나갔다. 1997년에는 '밑바닥'을 경험했다. 당시 재계 순위 7위였던 기아그룹은 자금난에 봉착,그룹 전체가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기아차는 3차에 걸친 국제입찰 끝에 1998년 10월 현대자동차를 새 주인으로 맞이했다. 당시 기아차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기아차로 인해 현대차가 동반 부실에 빠질 것이며,정상화에 최소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롤러코스터를 이겨낸 '리더십'

기아차를 살린 것은 현대차의 강력한 리더십이었다. 당시 정몽구 회장은 매주 2~3회씩 생산현장을 방문,생산성을 끌어올릴 것을 주문했다.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1997년 16.8대였던 종업원 1인당 생산대수가 1999년 28.9대까지 높아졌다. 1999년 카니발,카렌스,카스타 등 이른바 '카 트리오'로 불리던 미니밴이 시장에서 인기를 끈 것도 기아차 회생에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기아차는 2000년 1년 만에 법정관리에서 벗어나는 저력을 보였다.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기아차가 정상궤도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현대차의 지원으로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할 수 있지만 글로벌 경쟁력을 논하기에는 무리"라는 게 이 회사에 대한 시장의 평가였다. 세간의 우려는 2005년 현실이 됐다. 이렇다 할 히트 차종을 내놓지 못하면서 5000억원이 넘던 연간 영업이익이 74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듬해인 2006년에는 1253억원에 달하는 영업적자를 봤다.

구원투수로 나선 것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었다. 당시 기아차 최고경영자(CEO)였던 정 부회장은 2006년 9월 파리모터쇼에서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고,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CDO · Chief Design Officer)으로 영입했다. 가격 경쟁력이 다소 높다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디자인 경영의 힘

디자인 경영의 성과는 2008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체 이노베이션을 필두로 쏘울,포르테,쏘렌토R,K7 등 디자인이 미려한 신차들이 시장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강자로 발돋움한 것.글로벌 경제위기가 전 세계 시장을 강타한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1조원대 영업이익을 내는 성과를 거뒀다. 김용수 SK증권 연구위원은 "기획과 R&D(연구 · 개발) 등의 과정을 거쳐 신차가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대 6년가량"이라며 "적자를 낸 2006~2007년 뿌려 두었던 디자인 경영의 씨앗이 지난해 움트기 시작해 올 들어 꽃을 피웠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모닝,포르테,쏘울 등 중 · 소형차에만 집중했던 기아차가 쏘렌토R,스포티지R,K5,K7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1600만원대였던 대당 판매가격이 2000만원 이상으로 높아지면 그만큼 수익성이 좋아질 것이라는 진단이다. 기아차는 내년 하반기 에쿠스급 신차를 출시,전 차종 풀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다. 내년께 K5 하이브리드카를 내놓으며 친환경 차량 부문 경쟁력도 높일 방침이다.

6~7년간 내놓은 신차가 1세대 모델이었다는 점도 호재로 꼽힌다. 현대차의 쏘나타나 그랜저처럼 기존 제품을 업그레이드해 세대 변경 모델을 지속적으로 내놓을 경우 기존에 축적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자금 여력 면에서도 숨통이 트였다. 미국 조지아주 공장을 끝으로 대규모 시설투자를 마무리,예산을 신차 개발에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서영종 기아차 사장은 "품질과 디자인 면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며 "브랜드 이미지를 더 높이면 세계 시장을 무대로 본격적으로 승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