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시장이 3대 악재에 휩쓸려 환율이 25일 급등(원화 가치는 급락)했다. △그리스 위기가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이 고조되고 △취약한 외환시장에서 무조건 달러를 사달라는 쏠림현상이 겹치면서 외환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외환당국이 허겁지겁 달러를 내놓으면서 시장 붕괴는 막았지만 일각에선 2008년 하반기와 같은 외화유동성 위기가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유럽 리스크 확산


이날 원 · 달러 환율은 개장가인 1224원이 저점일 만큼 하루종일 급등 추세였다. 남유럽의 재정위기가 민간부문의 신용경색(credit crunch)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한 외환딜러는 "이탈리아의 한 대형은행이 글로벌 대출자금 및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홍콩시장에서 퍼졌다"고 전했다.

남유럽 재정위기에서 비롯된 신용경색 조짐은 한국으로선 핵폭풍에 버금가는 악재다. 한국은행이 이날 내놓은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한국의 대외채무는 총 4097억6000만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만기가 1년 미만인 단기 채무는 1546억2000만달러다.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터진 직후 외국인이 500억달러 이상을 한국 시장에서 회수하면서 원 · 달러 환율이 한때 1600원 선 근처까지 치솟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이 리먼 사태 초반과 닮은꼴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그러나 "지금은 외환보유액이 2800억달러에 육박하고 은행 등 금융회사의 달러 유동성이 괜찮아 그때와는 상황이 180도 다르다"고 강조했다. 한은은 외화유동성 위기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한반도 긴장 고조

이런 와중에 북한발 대형 악재가 외환시장을 강타했다. 한 탈북자 학술단체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전군,인민보안부,국가보위부 등에 만반의 전투태세에 돌입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한 것이다. 천안함 사태로 인해 남북간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어 외환시장이 일순간에 냉각됐다.

고은숙 도쿄미쓰비시은행 서울지점 딜러는 "이날 급등 현상은 정치적인 문제인 북한 리스크 때문"이라며 "해외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내일 당장 환율이 달러당 1300원대로 오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정치적 변수로 인한 것인 만큼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지만 대외 상황이 그리 빨리 호전될 것 같진 않다"고 진단했다.

원 · 달러 환율은 이달 들어서만 141원60전(12.8%) 뛰었다. 특히 최근 일주일 동안 103원40전(9.0%) 상승했다. 이날은 한때 1277원90전까지 오르기도 했다. 같은 기간 호주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 태평양 국가의 환율 상승폭(통화가치 하락폭)이 5% 수준이란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지정학적 위험에 따른 환율 상승폭이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승 쏠림이 더 큰 문제

이진우 NH투자선물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외환시장에서 수급상황이 완전히 붕괴됐다"고 전했다. 우선 외국인이 주식을 판 자금을 지속적으로 달러로 바꾸면서 달러 매수 수요가 우위다. 여기에 이달 초 환율이 1100원에서 1150원 수준으로 상승할 때 하락반전을 예상하고 달러를 팔아놓은 주체들이 대거 손실을 입고 손절매에 나서고 있다. 손절매는 아무리 높은 환율 수준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매입할 수밖에 없어 환율 오름폭을 부풀리게 된다.

여기에 달러를 시장에 내놓는 수출업체들은 주춤하고 있다. 우선 1150원 근처에서 대거 네고(수출환어음 매도)를 통해 달러를 내놓았으나 환율이 1200원을 가파르게 뚫고 올라가자 추가 상승을 기다리고 있다. 반면 수입업체들은 너도나도 달러 매수 주문을 넣고 있다.

이주열 한은 부총재는 이날 통화금융대책반 회의를 긴급 소집한 직후 기자들과 만나 "금융시장의 과도한 불안심리로 쏠림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외환당국인 한은과 기획재정부는 이 같은 쏠림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도 적절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이날도 외환당국은 시장안정을 위해 적잖은 물량의 달러를 매도했다고 외환시장 참가자들은 전했다.

한국의 외환시장 규모가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작고,외국자본 유출입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으며,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구조적 문제도 환율 변동성을 키우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박준동/이상은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