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365일 오픈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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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하루하루 유학생활에 점차 익숙해지며 곧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게 됐다.
그러나 그간 긴장 때문에 몸이 많이 약해졌던 탓이었을게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고 몸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던 내가 완전히 취해 기숙사로 업혀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학기를 무사히 마쳤음을 기념하고자 급우 한 명이 동기들을 모두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해방감을 느끼며 작심하고 술을 마셨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준비해 간 술은 물론 그 집에서 아껴 보관해 온 값비싼 술까지도 동이 나 버렸다.
평소 술에 관한 한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자신있게 친구들이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넙쭉넙쭉 받아들이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너무 달렸구나'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새벽에 깨어보니 기숙사 차가운 바닥에 혼자 누워 있었다.
너무 춥고 온 몸이 쑤시고 결려 아내를 몇 번이고 불러 찾았다.
그러나 아내가 대답할 리 없었다.
만날 바가지를 긁으면서도 해장하라고 콩나물국이나 북어국을 끓여주고, 한 술 뜨기 전에는 회사도 못 가게 했던 아내가 생각났다.
갑자기 내 처지가 어찌나 서러운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사진 속에서 날 바라보고 웃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아내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연초에 애들과 들어와 함께 살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금전적인 문제 등으로 가족들이 오기 쉽지 않은 여건이었지만, '필요하면 빌려 쓰고 나중에 갚지 뭐. 내가 언제 처자식과 외국 생활을 해 보겠어' 싶은 마음에 "여보, 잘 생각했어. 빨리 와."라며 아내와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부산히 했다.
당시 친했던 친구들이 Drexel Hill이란 곳에 많이 살았다.
때문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그 곳에 세를 얻었다.
1996년 1월 3일, 그토록 보고싶고 그리웠던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에 왔다.
당시 미 동북부는 17년 만인가 대폭설이 내려 일주일이상 집 근처에서만 보낸 기억이 난다.
그러나 원래 처자식과 좀 떨어져 지내야 할 팔자였나보다.
2주일도 채 안됐을 때, 장모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당시 '의약분업'을 놓고 한의사와 약사가 연일 데모하며 대치 중이었는데, 정부가 쟁점 사안에 최종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약사들은 정해진 기한 내에 의무적으로 한약조제시험을 봐야했고, 약사인 아내도 예외없이 시험을 봐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시험 준비기간까지 고려하면 아이들을 미국에 놓고 갈 수 없어 아이들과 아내는 다시 귀국해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한국으로 들어간 후 내 마음은 공허함으로 가득 찼다.
가족들과 함께 살 생각에 집까지 큰 곳으로 옮겨서 허전함과 우울함은 더 깊어만 갔다.
그렇다고 늦은 나이에 유학까지 온 내가 계속 방황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겨우 마음을 잡아 이 큰 공간을 활용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넓혀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먼저 집을 개방하여 급우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쓰게 했다.
당시 강의 과목도 많고 실무적인 커리큘럼으로 짜여있어 사례연구(case study) 과제가 적지 않았다.
사례연구 과제를 하다보면 친구들끼리 함께 모여 아이디어를 주고 받아야 하고, 소음이나 어린 자녀들의 장난을 피하고 싶거나 담배피우며 스트레스를 날리고 싶은 욕구를 충족할 만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혼자 사는 내 집이 딱 안성맞춤이었다.
원하는 친구들에게는 집 열쇠를 복사해 줌으로써 내가 집에 늦게 들어오더라도 누구든지 원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때 맥주 한 패키지 정도로 사용료를 대신한다는 친구들의 소정의 사례비는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가족이 떠나 공허함으로 가득 찼던 그 큰 집은 동기들의 공부방이자 긴장풀이의 명소요, 우리들만의 우정을 쌓았던 추억의 집으로 바뀌게 됐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욕심이 많던 나는 그후 학교가 아닌 곳에서 만나는 다른 분들께도 기꺼이 집을 개방했다.
주로 임마누엘 교회에서 만난 분들이었는데, UPENN(Univ. of Pennsylvania)에서 박사과정을 밟거나 현지에서 의사, 변호사 로 일하시는 분들이셨다.
신앙심이 몹시 두터웠던 분들은 처자식과 떨어져 정신적으로 많이 외로워하던 내게 큰 감동과 도전으로 2년 간의 내 신앙 생활을 이끌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