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저녁 서울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10층 삼정KPMG 본사.오후 9시가 넘은 시간,늦었지만 윤영각 회장이 비상소집한 긴급 임원회의가 열렸다. 한 달 전부터 고심해 왔던 언스트앤영(EY)한영회계법인과의 합병추진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한 것.

한 시간 전만 해도 윤 회장은 합병 쪽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하지만 이날 오후 8시께 KPMG인터내셔널로부터 날아온 이메일 한 통이 모든 걸 바꿔버렸다. 현재 제휴파트너인 KPMG가 언스트앤영한영에서 제시한 조건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기 때문.윤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이튿날 새벽 5시까지 마라톤 밤샘회의에 들어갔다. 격론이 오간 끝에 새벽녘에 내린 결론은 '유턴'.한 달여간 검토해 왔던 합병은 없던 일이 됐다.



◆직접경영 꾀하는 글로벌 회계법인


이번 합병 해프닝은 메이저 국내회계법인의 고민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빅3'로 불리는 삼일,삼정KMPG,딜로이트안진은 모두 글로벌 회계법인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삼일은 PwC,삼정은 KPMG,안진은 딜로이트가 파트너다. 이런 '동거구도'는 양 측의 필요에 따라 형성됐다. 국내 회계법인들은 선진 회계감사 노하우가 필요하고,글로벌 회계법인들은 커 가는 한국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현지 파트너와 손잡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글로벌 회계법인들이 2007년을 전후해 세계 각국의 토종 회계법인들을 직접 경영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는 점이다. 브랜드 사용료만 내면 되는 제휴관계였던 각국 '멤버 펌(member firm)'들을 통합된 '원 펌(one firm)' 체제로 유도 중이다. 세계 각국에서 일관성 있는 회계감사 서비스를 바라는 기업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지만,인사 · 예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삼정KPMG와 언스트앤영한영 간의 합병 논의도 이런 맥락이 숨어 있다. 삼정KPMG는 그간 윤 회장이 독자경영하는 '멤버 펌'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 KPMG인터내셔널이 직접 경영하는 '원 펌' 형태로 전환하자는 요구를 해오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런 가운데 언스트앤영한영이 독자경영을 보장하며 합병을 제안하자 윤 회장으로선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던 것.삼정 고위관계자는 "회계법인 통합에는 큰 위험이 있지만 경영상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는 언스트앤영한영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며 "원 펌으로 전환하면 경영상의 주요 결정을 본사가 내리게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고 말했다.

◆'불안한 동거' 계속될 듯


삼정과 KPMG 본사 간의 갈등은 결국 KPMG 측이 윤 회장의 독립경영을 보장하고 500억원가량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조건을 새로 제시하면서 봉합됐다. 하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KPMG가 '멤버 펌'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나라가 한국과 대만밖에 없어 이런 예외를 언제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

업계 1위인 삼일회계법인 역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삼일은 현재 '멤버 펌'보다 느슨한 형태인 '네트워크 펌'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2007년부터 PwC 본사 측에서 '멤버 펌'으로 들어오라는 요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한덕철 삼일회계법인 부대표는 "글로벌 파트너사를 교체하는 건 회계감사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이라 어려운 일이지만 삼일의 독자성과 정체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빅3 회계법인이 글로벌 회계법인과의 제휴 없이 독자생존의 길을 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과 같은 국내 대기업의 경우 한국 토종회계법인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회계감사 보고서는 글로벌 투자자들이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시장이 커지고 있는 재무자문,M&A자문 등 비감사 부문의 경쟁력을 키우려면 글로벌 회계법인들의 노하우와 브랜드 파워가 필수적이다. 국내외 회계법인 간 '불안한 동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업계 안팎의 일관된 전망이다.

김동윤/박민제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