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잊지못할 그 순간] "26년전 코리아펀드 뉴욕 상장 패기로 이뤄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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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호 금융투자협회 회장
1년간 월스트리트서 투자 설명…'코리아 프리미엄'으로 10배 뛰어
1년간 월스트리트서 투자 설명…'코리아 프리미엄'으로 10배 뛰어
"황 부장,두 가지는 꼭 지켜줘야 하오."
1984년 8월,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허름한 식당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박상은 당시 재무부 증권보험국장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코리아펀드 상장과 운용을 위해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기 보름 전이었다. 코리아펀드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내 기업에 투자하는 투자펀드를 선진 증권시장에 공개상장하는 것인 만큼 정부의 고민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민간 증권사에서 대우증권이 주관회사로 선정됐고 회사를 대표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필자의 어깨도 무거웠다.
당시 이인원 과장,강정호 사무관과 함께 한 그 자리에서 박 국장의 주문은 뉴욕증시 상장에 성공할 것과 주당 12달러에 상장할 예정인 코리아펀드 주가가 한 자릿수(10달러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상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가는 노력한다고 관리되는 게 아닌 만큼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주문이었다. 그렇다고 망설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33세 때 이야기다.
1983년 말부터 재무부 공무원과 대우증권 직원 등 4명이 팀을 짜 월스트리트를 돌아다니며 투자자를 만났다. 최종적으로 미국 증권사인 퍼스트 · 보스턴을 주간사로 해 대우증권과 코리아펀드 주간사단을 구성하고 스카다 스티븐스&클락과 대우경제연구소가 투자운용을 맡았다.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해 개인 소액투자자를 2000명 이상 모아야 한다는 미 증권관리위원회(SEC) 규정에 따라 리먼브러더스의 전신인 '시어슨 리먼브러더스'도 참여했다. 선진 금융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한국인들에겐 모두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당시 접촉한 미국 금융계 인사들은 굳이 상장하지 말고 비상장으로 주식을 거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뉴욕 증권거래소보다 한 단계 낮은 '아메리칸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뉴욕증시 상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순히 해외 자본 유치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들어 우리 기업들은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었지만 해외에선 적정한 평가를 못 받았다. 코리아펀드 상장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가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해외 자본조달이 불가피할 것이고 이를 위해 코리아펀드가 선두에 선 채 공모 방식으로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해야만 했다.
1년여 가까이 월스트리트를 누비며 수백명의 투자자에게 코리아펀드를 설명한 끝에 1984년 8월,코리아펀드는 당시 국내 증시 시가총액이 40억달러 남짓한 상황에서 자본금 6000만달러를 미국시장에서 공모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킬 수 있었다. 상장 첫날 주당 12.75달러였던 주가는 1년 만에 거의 10배인 122달러까지 치솟았다. 성장하는 한국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코리아 프리미엄'이 형성된 결과였다. 결국 주가를 한 자릿수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주문'에 대해 나는 세 자릿수의 주가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코리아펀드 상장 시절 우리를 도와줬던 외국 금융사 중 하나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지 만 2년이 돼 간다. 유로존의 위기로까지 번지며 세계 금융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금융계에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 중심의 국제금융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국내 금융투자회사들이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진출할 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코리아펀드 상장 이후 26년이 지나는 동안 글로벌 마인드나 외국어 능력 면에서 후배 금융인들의 경쟁력이 많이 향상됐다. 하지만 이왕이면 패기와 진취성도 함께 갖추라고 당부하고 싶다. 처음 시작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워 보이지만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돌파하지 못할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한없이 높아보이던 선진 증시의 벽을 넘었던 26년 전 이야기를 지금에 와 다시 꺼내는 이유다.
황건호 금융투자협회 회장
1984년 8월,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허름한 식당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박상은 당시 재무부 증권보험국장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코리아펀드 상장과 운용을 위해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기 보름 전이었다. 코리아펀드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내 기업에 투자하는 투자펀드를 선진 증권시장에 공개상장하는 것인 만큼 정부의 고민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민간 증권사에서 대우증권이 주관회사로 선정됐고 회사를 대표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필자의 어깨도 무거웠다.
당시 이인원 과장,강정호 사무관과 함께 한 그 자리에서 박 국장의 주문은 뉴욕증시 상장에 성공할 것과 주당 12달러에 상장할 예정인 코리아펀드 주가가 한 자릿수(10달러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상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가는 노력한다고 관리되는 게 아닌 만큼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주문이었다. 그렇다고 망설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33세 때 이야기다.
1983년 말부터 재무부 공무원과 대우증권 직원 등 4명이 팀을 짜 월스트리트를 돌아다니며 투자자를 만났다. 최종적으로 미국 증권사인 퍼스트 · 보스턴을 주간사로 해 대우증권과 코리아펀드 주간사단을 구성하고 스카다 스티븐스&클락과 대우경제연구소가 투자운용을 맡았다.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해 개인 소액투자자를 2000명 이상 모아야 한다는 미 증권관리위원회(SEC) 규정에 따라 리먼브러더스의 전신인 '시어슨 리먼브러더스'도 참여했다. 선진 금융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한국인들에겐 모두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당시 접촉한 미국 금융계 인사들은 굳이 상장하지 말고 비상장으로 주식을 거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뉴욕 증권거래소보다 한 단계 낮은 '아메리칸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뉴욕증시 상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순히 해외 자본 유치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들어 우리 기업들은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었지만 해외에선 적정한 평가를 못 받았다. 코리아펀드 상장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가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해외 자본조달이 불가피할 것이고 이를 위해 코리아펀드가 선두에 선 채 공모 방식으로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해야만 했다.
1년여 가까이 월스트리트를 누비며 수백명의 투자자에게 코리아펀드를 설명한 끝에 1984년 8월,코리아펀드는 당시 국내 증시 시가총액이 40억달러 남짓한 상황에서 자본금 6000만달러를 미국시장에서 공모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킬 수 있었다. 상장 첫날 주당 12.75달러였던 주가는 1년 만에 거의 10배인 122달러까지 치솟았다. 성장하는 한국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코리아 프리미엄'이 형성된 결과였다. 결국 주가를 한 자릿수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주문'에 대해 나는 세 자릿수의 주가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코리아펀드 상장 시절 우리를 도와줬던 외국 금융사 중 하나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지 만 2년이 돼 간다. 유로존의 위기로까지 번지며 세계 금융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금융계에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 중심의 국제금융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국내 금융투자회사들이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진출할 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코리아펀드 상장 이후 26년이 지나는 동안 글로벌 마인드나 외국어 능력 면에서 후배 금융인들의 경쟁력이 많이 향상됐다. 하지만 이왕이면 패기와 진취성도 함께 갖추라고 당부하고 싶다. 처음 시작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워 보이지만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돌파하지 못할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한없이 높아보이던 선진 증시의 벽을 넘었던 26년 전 이야기를 지금에 와 다시 꺼내는 이유다.
황건호 금융투자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