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16년 만에 옛사랑을 만난다 한들 이토록 순식간에 녹아들 수 있을까. 대한민국 '여배우 트로이카'의 첫 번째 계보를 장식했던 배우 윤정희는 300편이 넘는 작품을 만날 때마다 늘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그는 세계적인 여배우이기 이전에 '시'의 미자마냥 그저 사랑해주고 싶은 한 인간이었다.

'만무방' 이후 꼭 16년 만이다. 배우 윤정희(66 · 사진)의 오랜 공백을 깬 주인공은 이창동 감독.'시'는 윤정희라는 배우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태생조차 없었을 작품이다.

한 여배우를 위한 영화감독의 '짝사랑'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시'는 최근 제6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낭보를 전했다.

"(주인공)미자가 나랑 너무 똑같아서 오히려 빠져들기 어려웠어요. 미자가 좀 엉뚱하잖아요. 단지 알츠하이머병 초기라 그런 건 아니죠.완전히 꿈속에 빠진 여자잖아요. 그게 나랑 비슷하다니까요. 내가 원래 들국화 핀 것만 봐도 사람들이 오버한다고 할 정도로 탄성을 지르고 구름에 가려진 달만 봐도 눈물이 나고 그러거든요. "

여전히 아름다운 배우 윤정희는 종달새 노래처럼 얘기를 쏟아냈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절대 가족과 함께 보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뜨린 작품이 '시'다. 이번에는 남편(피아니스트 백건우) 앞에서 연기 연습도 불사했다. 생전 처음 들었던 트로트 곡 '와인글라스'(미자가 극중에서 부르는 곡)를 감칠맛나게 소화하기 위해 원래 가수(최유나)의 사사까지 감행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윤정희'지만 촬영장만 벗어나면 '손미자'(본명)로 살아요. 자랑 같지만 요리도 좀 잘하는데,아직도 (파리에서) 멸치젓으로 김치를 담가요. 우리 집에 가면 담근 연도를 써 붙여둔 멸치젓 통이 가득해요. 손님 치를 때도 그냥 한국식으로 해요. 김치찌개,된장찌개,부침개 몇 가지에 불고기만 차려내면 외국 손님들은 그냥 '뿅'간다니까요. 하하."

대한민국 '국보급' 배우와 '국보급' 피아니스트,바이올린 켜는 딸.세 식구가 꾸려가는 삶이 파리 어느 골목 작은 화방에 걸린 그림마냥 소박하다.

"한국에서는 너무 주목받고 사는 바람에 자유가 없었죠.촬영장과 집만 오갔으니까. 1971년 한 해 출연작이 41편에 달했어요. 파리에서는 지하철 타고 다녀요. 그래도 행복해.파리가 역사와 예술의 도시로 겉모습이 멋있어 보이지만 속에도 아주 알찬 아름다움이 있어요. 한번은 자기 성을 가지고 있을 만큼 부호인 프랑스경제협회장을 만났는데 그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죠.부잣집이라 음식도,와인도 아주 근사하게 나올 것 같잖아요? 근데 웬걸,우리 집 저녁상이랑 별반 다를 게 없더라고.(웃음)"

수채화처럼 자연스럽고 은은하게.딱 두 번 만나고 '천생연분'이라며 백년해로를 결정해 버린 아티스트 부부치고는 진득한(?) 삶의 자세다. 연습에 지치면 바람 쐴 겸 하는 장보기는 이제 남편의 몫이고,남편이 두 손 가득 사들고 온 멸치로 담근 홈메이드 멸치젓에 마늘,파 쫑쫑 썰어 넣고 참기름 살짝 더해 미역 쌈장 만드는 일은 아내의 몫이다. 스파게티,리조토 하나를 만들어도 정통 레시피를 깨고 '창작'을 하고야 마는 남편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셰프다.

"부부가 너무 닮아도 재미없잖아요. 가끔 입국할 때 세관 사람들이 우리더러 엉뚱하게 얼굴이 닮았다고 하는데 어디 정말 그래요?그건 아니잖아.(웃음) 대신 남편하고 살면서 배운 게 있어요. 원래 난 성격이 급한 편이고 남편은 일할 땐 한치의 빈틈도 없는 사람이지만 평상시엔 아주 느긋한데,살다 보니 내가 좀 느긋해지긴 하더라고요. "

예순을 넘겼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이 여배우가 부럽다. 짬 나면 멸치젓 넣어 쌈 싸먹으라고 파리로 미역 한 다발 보내줄까 싶다.

글=장헌주/사진=김기남 한경매거진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