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4) 가격혁명과 펀더멘털‥16세기 제국의 興亡열쇠는 '펀더멘털' 이었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무적함대 스페인, 모든 공산품 수입 '산업 공동화' 자초
대영제국, 자본집약적 工·商·農業 골고루 발전시켜 승승장구
대영제국, 자본집약적 工·商·農業 골고루 발전시켜 승승장구
1980년대 초 호주에 유학 가서 세 번 놀랐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숨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여유에 놀랐다. 소고기 값에도 놀랐다. 당시 한국에선 구경조차 힘들던 그 귀한 갈비를 통째로 뜰채에 묶어 게 낚시의 미끼로 사용할 정도로 쌌다. 마지막은 너무나 비싼 공산품 값이었다. 자동차와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사소한 물건까지 일단 공산품이라면 도무지 싼 게 없었다.
어찌된 것일까. 알고 보니 호주의 비싼 공산품 가격은 1970년대 2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석유파동과 관련이 있었다.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1972년 배럴당 2.5달러였던 석유 값은 1980년에 31달러를 넘어섰다. 이로 인해 세계경제는 생산비용 급증과 물가인상,경기침체라는 삼중고를 겪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러나 위기라고 해서 모두에게 위기인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경제적 기회를 맞은 나라들도 있었는데 호주도 그 중 하나였다. 가장 보편적인 대체에너지라고 할 석탄이 1조t 이상 매장되어 있었고, 그것도 대부분 노천광 형태로 개발돼 있어 수요만 있다면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석탄 가격이 올라가자 자동차 · 전자 등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급히 돈을 회수, 석탄생산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1960년대 국내총생산(GDP)의 0.5% 수준에 불과했던 광산 투자는 1980년대 초 3%까지 확대됐으며 공산품 수입의존도는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석탄 붐은 반짝 경기로 막을 내렸고 호주도 곧 불황의 늪 속에 빠져들게 됐다. 한번 무너진 제조업의 인프라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16세기 가격혁명의 한 가운데 있었던 스페인은 유럽의 최강대국이었다. 물론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여온 금 · 은이 국부의 원천이었다. 무적함대로 상징되는 강력한 군대를 키워 세계를 호령하고, 최고의 재료와 기술자들을 불러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덕분이었다.
인구증가로 곡물 수요가 늘어나고 가격이 치솟았지만 생산성 향상에 힘쓰기보다는 수입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변화하는 경제상황에 적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근면과 인내라는 덕목을 잃어버렸으며 "우리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기를 원한다(Queremos comer sin trabajar)"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쉽게 얻은 돈은 쉽게 나간다고 했던가. 남미 포토시 은광의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스페인에 남은 것은 산업의 공동(空洞)화와 국민적 무기력이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걸 가지고 스페인의 몰락과 대영제국 탄생의 결정적 순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단지 상징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원정에 참가한 배 130여척 중 3분의 2가 살아 돌아왔으며 매우 빠르게 '무적함대'의 전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영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결국 경제의 펀더멘털이었다.
16세기 영국은 스페인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1500년 20만t에 불과하던 석탄 생산은 17세기 중반 150만t으로 늘어났으며 분사식 용광로의 대중화에 힘입어 금속제품 제조도 5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의류산업 성장은 눈부신 것이었다.
과거 가공되지 않은 양모를 그대로 수출하던 영국은 16세기 중반부터 대부분의 상품을 원단 형태로 가공해 수출했다. 수출량은 8배까지 늘어났으며 수십만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영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탄탄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소는 농업이었다.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자본집약적이고 상업지향적인 농업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전환농업(convertible husbandry)이 있었다. 이는 대규모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여러 구역으로 분리, 각기 목축지와 경작지로 사용하다 몇 년 후에는 용도를 바꾸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공기 중의 질소를 토양에 흡수시키는 콩과식물을 주로 재배한 목축지에는 가축의 배설물이 수년간 스며들어 경작지로 전환될 무렵에는 토양의 비옥도가 매우 좋았고, 자연히 농업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수 있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어찌된 것일까. 알고 보니 호주의 비싼 공산품 가격은 1970년대 2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석유파동과 관련이 있었다.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1972년 배럴당 2.5달러였던 석유 값은 1980년에 31달러를 넘어섰다. 이로 인해 세계경제는 생산비용 급증과 물가인상,경기침체라는 삼중고를 겪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러나 위기라고 해서 모두에게 위기인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경제적 기회를 맞은 나라들도 있었는데 호주도 그 중 하나였다. 가장 보편적인 대체에너지라고 할 석탄이 1조t 이상 매장되어 있었고, 그것도 대부분 노천광 형태로 개발돼 있어 수요만 있다면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석탄 가격이 올라가자 자동차 · 전자 등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급히 돈을 회수, 석탄생산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1960년대 국내총생산(GDP)의 0.5% 수준에 불과했던 광산 투자는 1980년대 초 3%까지 확대됐으며 공산품 수입의존도는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석탄 붐은 반짝 경기로 막을 내렸고 호주도 곧 불황의 늪 속에 빠져들게 됐다. 한번 무너진 제조업의 인프라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16세기 가격혁명의 한 가운데 있었던 스페인은 유럽의 최강대국이었다. 물론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여온 금 · 은이 국부의 원천이었다. 무적함대로 상징되는 강력한 군대를 키워 세계를 호령하고, 최고의 재료와 기술자들을 불러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덕분이었다.
인구증가로 곡물 수요가 늘어나고 가격이 치솟았지만 생산성 향상에 힘쓰기보다는 수입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변화하는 경제상황에 적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근면과 인내라는 덕목을 잃어버렸으며 "우리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기를 원한다(Queremos comer sin trabajar)"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쉽게 얻은 돈은 쉽게 나간다고 했던가. 남미 포토시 은광의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스페인에 남은 것은 산업의 공동(空洞)화와 국민적 무기력이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걸 가지고 스페인의 몰락과 대영제국 탄생의 결정적 순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단지 상징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원정에 참가한 배 130여척 중 3분의 2가 살아 돌아왔으며 매우 빠르게 '무적함대'의 전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영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결국 경제의 펀더멘털이었다.
16세기 영국은 스페인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1500년 20만t에 불과하던 석탄 생산은 17세기 중반 150만t으로 늘어났으며 분사식 용광로의 대중화에 힘입어 금속제품 제조도 5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의류산업 성장은 눈부신 것이었다.
과거 가공되지 않은 양모를 그대로 수출하던 영국은 16세기 중반부터 대부분의 상품을 원단 형태로 가공해 수출했다. 수출량은 8배까지 늘어났으며 수십만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영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탄탄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소는 농업이었다.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자본집약적이고 상업지향적인 농업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전환농업(convertible husbandry)이 있었다. 이는 대규모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여러 구역으로 분리, 각기 목축지와 경작지로 사용하다 몇 년 후에는 용도를 바꾸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공기 중의 질소를 토양에 흡수시키는 콩과식물을 주로 재배한 목축지에는 가축의 배설물이 수년간 스며들어 경작지로 전환될 무렵에는 토양의 비옥도가 매우 좋았고, 자연히 농업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수 있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