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95) 화천그룹‥일본인 철공소 인수…화천이 만들면 '국내 최초'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국전쟁 후 주물 수요 몰려
59년 수동형 선반 없어서 못팔아
중화학 육성과 함께 제2도약
59년 수동형 선반 없어서 못팔아
중화학 육성과 함께 제2도약
1959년 3월 어느 날.주물업체 화천기공사의 권승관 명예회장(2004년 작고)은 주물 가공용 공작기계인 일제선반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년째 업종변경을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던 차였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저거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첫 국산 공작기계 개발은 이렇게 시작됐다.
1952년 설립된 화천그룹(회장 권영렬 · 64)은 피대선반,NC(수치제어)선반,밀링머신 등을 잇달아 국산화했다. 화천의 역사는 곧 국내 공작기계산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천은 현재 국내 시장의 약 22%를 차지하며 두산인프라코어,현대위아와 함께 이른바 업계 '빅3'로 통한다. 화천기공 등 4개 계열사가 230여종의 공작기계를 만들어 연 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화천그룹은 CNC선반,머시닝센터 등을 만드는 화천기공과 연삭기,일반선반 등을 제조하는 화천기계 및 서암기계,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TPS코리아 등 4개 업체로 구성돼 있다.
전주 태생인 고 권 명예회장은 15세 되던 1930년 보통학교(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중퇴,전주의 한 주물공장에 취직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10여년간 주물기술을 익힌 그는 1940년 광주의 주물공장인 파철공소에 스카우트된다. 이즈음 함께 일하던 동생이 사고로 한쪽 팔을 잃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는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일본인 사장으로부터 파철공소를 인수해 1952년 화천기공사로 사명을 바꿔 달았다.
한국전쟁 후 부서진 대문을 비롯해 주물로 된 물품들의 수요가 늘어난 데다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감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주물공장이 늘어나면서 권 명예회장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고민하다가 선반이 돈이 되겠다는 것을 직감,1959년 국내 최초의 수동형 선반인 피대선반을 개발했다. 권영렬 회장은 "일본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데다 최고 품질의 철인 전차용 쇠로 만든 제품이라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말했다.
권 명예회장은 1964년 국내 최초로 기어구동식 선반 등을 잇달아 개발하며 사세를 넓혀갔다. 그러던 1972년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발표하면서 공고와 공대에서 쓸 실습용 공작기계의 수요가 부쩍 늘었고 정부로부터 약 80만달러의 외화지원까지 받으며 회사는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공동연구를 통해 1976년 국내 최초의 자동선반인 NC선반 등을 국산화했고,1977년엔 업계 처음으로 미국시장에 2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호사다마인가. 제2차 오일쇼크로 어려움을 겪던 차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급서하며 정부 지원도 끊겨 1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1980년 결국 1차 부도를 맞았다. 무리하게 회사를 확장시킨 게 화근이 됐다.
대학을 졸업한 1969년 아버지의 강권으로 공장밥을 먹게 된 권 회장은 1979년 회사가 가장 어려울 때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입사 후 10년간 자재 구매부터 생산,자금조달까지 다양한 업무를 거쳤다. 어려운 시기의 가업 승계에 대해 권 회장은 "젊은 사람의 빠른 판단력과 대처능력이 위기극복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당시 직원의 절반 가까운 400여명을 내보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여기에 임직원들이 3개월간 급여를 자진반납하는 등 회사 살리기에 나섰고,전라남도와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정부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의 노력을 계속한 결과 정부로부터 10억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이후 3년 만에 적자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권 회장은 "하루하루 목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며 "감원과 임금체불이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안정을 찾은 권 회장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거래처를 다변화하는 것이 위기를 피해가는 길이란 걸 깨우쳤다"고 말했다. 화천은 1985년 미국,1993년엔 독일에 현지법인을 세웠다. 꾸준히 해외 시장을 개척해 수출 국가를 약 30개국으로 늘리며 1990년 수출실적 약 1000만달러를 돌파한 뒤 지금까지 전체 매출의 30%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권 회장은 "꾸준히 해외거래선을 관리해온 결과 외환위기가 닥쳐도 환율 상승으로 인해 오히려 이익률이 더 높아져 감원이나 임금삭감 등을 피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기술개발에도 힘썼다. 권 회장은 1988년 국내 최초로 전자동 선반인 CNC선반 개발을 시작으로 1996년에는 머시닝센터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회사는 최근 2년간의 연구 끝에 금속 가공면을 뒤집어 깎을 수 있는 등 5방향으로 작업이 가능한 5축 머시닝센터 신제품 'M9'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최근 미국 항공기회사 보잉에 비행기 날개와 동체 가공용 시제품으로 납품했다.
화천은 3대째 가업을 이어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2005년 입사한 권 회장의 장남 권형석 해외영업부 이사(37)는 국내 업계의 관행인 해외딜러를 통한 판매 비중을 낮추고 직판체제를 가동했다. 이를 위해 최종 소비자와 상담 때 쓰는 견적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하는 등 회사의 글로벌화에 앞장서고 있다. 권 이사는 "화천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수출로 올리는 것이 목표"라며 "직원들이 세계적인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광주=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
협찬 : 중소기업중앙회 , 중소기업진흥공단
1952년 설립된 화천그룹(회장 권영렬 · 64)은 피대선반,NC(수치제어)선반,밀링머신 등을 잇달아 국산화했다. 화천의 역사는 곧 국내 공작기계산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천은 현재 국내 시장의 약 22%를 차지하며 두산인프라코어,현대위아와 함께 이른바 업계 '빅3'로 통한다. 화천기공 등 4개 계열사가 230여종의 공작기계를 만들어 연 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화천그룹은 CNC선반,머시닝센터 등을 만드는 화천기공과 연삭기,일반선반 등을 제조하는 화천기계 및 서암기계,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TPS코리아 등 4개 업체로 구성돼 있다.
전주 태생인 고 권 명예회장은 15세 되던 1930년 보통학교(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중퇴,전주의 한 주물공장에 취직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10여년간 주물기술을 익힌 그는 1940년 광주의 주물공장인 파철공소에 스카우트된다. 이즈음 함께 일하던 동생이 사고로 한쪽 팔을 잃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는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일본인 사장으로부터 파철공소를 인수해 1952년 화천기공사로 사명을 바꿔 달았다.
한국전쟁 후 부서진 대문을 비롯해 주물로 된 물품들의 수요가 늘어난 데다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감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주물공장이 늘어나면서 권 명예회장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고민하다가 선반이 돈이 되겠다는 것을 직감,1959년 국내 최초의 수동형 선반인 피대선반을 개발했다. 권영렬 회장은 "일본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데다 최고 품질의 철인 전차용 쇠로 만든 제품이라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말했다.
권 명예회장은 1964년 국내 최초로 기어구동식 선반 등을 잇달아 개발하며 사세를 넓혀갔다. 그러던 1972년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발표하면서 공고와 공대에서 쓸 실습용 공작기계의 수요가 부쩍 늘었고 정부로부터 약 80만달러의 외화지원까지 받으며 회사는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공동연구를 통해 1976년 국내 최초의 자동선반인 NC선반 등을 국산화했고,1977년엔 업계 처음으로 미국시장에 2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호사다마인가. 제2차 오일쇼크로 어려움을 겪던 차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급서하며 정부 지원도 끊겨 1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1980년 결국 1차 부도를 맞았다. 무리하게 회사를 확장시킨 게 화근이 됐다.
대학을 졸업한 1969년 아버지의 강권으로 공장밥을 먹게 된 권 회장은 1979년 회사가 가장 어려울 때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입사 후 10년간 자재 구매부터 생산,자금조달까지 다양한 업무를 거쳤다. 어려운 시기의 가업 승계에 대해 권 회장은 "젊은 사람의 빠른 판단력과 대처능력이 위기극복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당시 직원의 절반 가까운 400여명을 내보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여기에 임직원들이 3개월간 급여를 자진반납하는 등 회사 살리기에 나섰고,전라남도와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정부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의 노력을 계속한 결과 정부로부터 10억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이후 3년 만에 적자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권 회장은 "하루하루 목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며 "감원과 임금체불이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안정을 찾은 권 회장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거래처를 다변화하는 것이 위기를 피해가는 길이란 걸 깨우쳤다"고 말했다. 화천은 1985년 미국,1993년엔 독일에 현지법인을 세웠다. 꾸준히 해외 시장을 개척해 수출 국가를 약 30개국으로 늘리며 1990년 수출실적 약 1000만달러를 돌파한 뒤 지금까지 전체 매출의 30%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권 회장은 "꾸준히 해외거래선을 관리해온 결과 외환위기가 닥쳐도 환율 상승으로 인해 오히려 이익률이 더 높아져 감원이나 임금삭감 등을 피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기술개발에도 힘썼다. 권 회장은 1988년 국내 최초로 전자동 선반인 CNC선반 개발을 시작으로 1996년에는 머시닝센터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회사는 최근 2년간의 연구 끝에 금속 가공면을 뒤집어 깎을 수 있는 등 5방향으로 작업이 가능한 5축 머시닝센터 신제품 'M9'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최근 미국 항공기회사 보잉에 비행기 날개와 동체 가공용 시제품으로 납품했다.
화천은 3대째 가업을 이어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2005년 입사한 권 회장의 장남 권형석 해외영업부 이사(37)는 국내 업계의 관행인 해외딜러를 통한 판매 비중을 낮추고 직판체제를 가동했다. 이를 위해 최종 소비자와 상담 때 쓰는 견적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하는 등 회사의 글로벌화에 앞장서고 있다. 권 이사는 "화천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수출로 올리는 것이 목표"라며 "직원들이 세계적인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광주=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
협찬 : 중소기업중앙회 , 중소기업진흥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