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율촌의 인수 · 합병( M&A)팀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상대할 때마다 국내의 배임죄를 설명하느라 애를 먹는다. 대부분 해외 국가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기업 인수자금을 금융회사에서 조달하는 차입매수(LBO · Leveraged Buyout)로 M&A를 하면 담보나 보증 방식에 따라 배임죄 적용을 받을 수 있어서다. 윤희웅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LBO 방식을 형사처벌하는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해 외국 투자자들이 M&A를 불안해 한다"며 "국내 M&A 활성화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기업인과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 기업인들이 '배임 리스크'에 떨고 있다. 한국의 배임죄 적용이 폭넓고 기준이 모호해 정상적인 경영 활동까지 방해받는다는 하소연이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검찰 등이 기계적인 배임죄 적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법조항 모호…무죄율 일반사건 7배

8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손해액 5억원 이상인 배임사건(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은 1심 무죄율이 15.6%로 전체 형사사건 1심 무죄율(2.2%)의 7배가 넘었다. 5억원 미만 배임(형법 위반) 1심 무죄율도 8.3%로 4배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처럼 배임사건의 무죄율이 높은 것은 무엇보다 배임죄가 포괄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현행 법에서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자신이나 제3자에게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케 해 회사 등에 손해를 가하는 것'을 배임으로 정의하고 있다. 불법 이익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도 가능한 중죄다.

문제는 정당한 경영 판단 후 결과적으로 회사가 손해를 입었을 경우와 구분이 힘들다는 점이다. 더욱이 판례에서는 실제 손해가 없이 손해 위험이 발생하기만 해도 처벌토록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있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는 지적이다. 경영 판단 의도에 대한 해석,경영 상황 변화 등에 따라 법원 판결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농협중앙회 전 신용대표이사 정씨 등은 "워크아웃이 진행 중이어서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한 팬택 계열사의 단기 기업어음(CP) 501억원어치를 매입한 것은 손해의 위험을 발생시킨 것"이라며 1심에서 배임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지난달 2심 법원은 "팬택 계열사가 워크아웃이 순조롭게 진행돼 매입이 무모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로 판결했다.

◆"경영 · 정책 판단에 적용 최소화해야"

LBO 방식 M&A도 피인수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인수자금을 대출받거나 보증을 받으면 배임죄 적용 대상이다. 인수기업의 부채가 피인수기업에 전가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한발 더 나아가 인수기업과 피인수기업을 하나의 회사로 합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기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4월 이 같은 방식으로 한일합섬을 인수한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양시경 태평양 변호사는 "합병을 하려면 주주총회 특별결의와 채권자 보호 절차,반대 주주의 주식매수 절차까지 거치는데 이를 배임으로 기소한 것은 무리였다"고 지적했다.

배임죄는 공무원의 정책 판단에도 적용돼 논란이 일고 있다. 공무원도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여서다. '론스타 외환은행 인수'와 관련해 배임죄로 기소됐다 1심에 이어 지난해 12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변 전 국장이 검찰에 기소되자 관료사회에서는 보신주의인 '변양호 신드롬'이 확산되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경영 및 정책 판단에 대한 배임죄 적용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윤희웅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배임을 민사가 아닌 형사 사건으로 다루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고 일본마저도 LBO 방식 M&A는 배임죄 적용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상현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상사법이나 행정법으로 규제가 가능한 영역에 개인적 법익을 규율하는 배임죄를 확장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