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닷컴] 검은색 세인트크로익스(St.Croix) 터틀넥 셔츠,리바이스 501 청바지,뉴발란스 조깅화….

7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 등장한 잡스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차림 그대로였다.청바지는 새것도 헌것도 아닌 적당히 물이 빠진 색깔,엉덩이 위 허리 아래에 살짝 걸치고 있었다.‘프레젠테이션의 귀재’ 잡스는 청중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 복장은 언제나 캐주얼 차림이다.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들은 때론 강렬히 다가온다.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잡스의 프레젠테이션 현장을 애플 직원들은 이렇게 말한다.짧은 헤드라인과 쉬운 문장 속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쓰지 않는 용어들을 툭툭 내던진다.“세계에서 가장 얇은”이란 표현을 할 때도 ‘세상’(world)이란 단어보다 ‘혹성’(planet)이란 단어를 더 많이 썼다.그의 이름 앞에 붙는 몽상가,괴짜란 수식어와 어울리는 단어다.

◆트위터식 헤드라인과 화려한 수식

잡스가 사용하는 언어는 매우 짧다.한 문장은 주어,동사,목적어의 단순 구조에 알파벳 140자를 넘지 않는다.트위터와 비슷한 방식이다.아이팟을 내놓을 때는 “당신의 호주머니 안에 1000곡의 음악”이라 말했고,노트북PC인 맥북에어를 출시하면서는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라고 강조했다.아이폰4가 ‘가장 얇은 스마트폰’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잡스는 ‘아주 멋진(gorgeos)’ ‘굉장한(awesome)’ 등과 같은 생생한 형용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쉴새 없이 ‘위대한(great)’‘놀라운(amazing)’‘믿기지 않는(unbelievable)’‘엄청난(tremendous)’‘경이로운(phenomenal)’ 등의 단어를 써가며 제품을 자랑했다.프레젠테이션 언어에 있어 잡스는 ‘절제’와 거리가 멀다.오히려 ‘과장’에 가깝다.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던지는 그의 단어들은 머릿속에 각인된다.그는 아이폰4를 두고 “우리가 만든 제품 중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했다.

◆영웅과 악당의 구도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엔 영웅과 악당이 등장한다.매킨토시 컴퓨터를 처음 내놓을 때 IBM을 ‘빅 브라더’로 묘사하며 악의 축으로 몰아세운 것처럼 이번엔 구글을 겨냥했다.아이패드를 발표할 땐 ‘넷북’을 느리고 디스플레이 화질이 떨어지며 거추장스럽고 오래된 PC라고 공격했다.그러고는 “좀 더 나은 게 있다”며 영웅 ‘아이패드’를 등장시켰다.

이날 행사에선 구글에 대해 3번 이상 공격적 멘트를 날렸다.프레젠테이션 초반엔 “애플이 아이패드에서 판매한 돈이 구글애드(구글의 광고 솔루션)로 5년간 번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해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다.

‘멀티 태스킹’(한번에 여러 기능을 실행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구글에 직격탄을 날렸다.구글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가 “백그라운드에서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면 배터리 소모가 많다”는 말을 한 것과 관련,아이폰4는 최신 칩세트를 사용해 배터리를 많이 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프레젠테이션 초반엔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아이폰의 약진을 자랑하며 안드로이드폰의 점유율이 낮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마케팅 전문가인 마틴 린드스트롬은 “공통의 적을 제시하면 믿음을 드러낼 기회와 함께 ‘신도’끼리 단결할 명분이 생긴다”고 분석했다.

◆잡스도 실수를 하네

하지만 천하의 잡스도 이날 프레젠테이션 중간에 적잖이 당황했다.아이폰4의 장점으로 내세웠던 ‘레티나(망막) 디스플레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기존 3GS 모델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장 와이파이(무선랜) 망을 이용해 뉴욕타임스 사이트를 불러들이려 했지만 작동이 멈춘 것.원인은 모스콘센터에 수백 명이 와이파이 기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0여분 뒤 이유를 확인한 잡스는 “(이곳의 한계인) 570개의 와이파이가 이미 사용되고 있어 시연을 할 수 없었다”며 “시연을 원하세요,블로깅을 원하세요”라고 되물었다.현장에 있는 미디어들과 참석자들이 와이파이를 너무 많이 이용해 시연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점을 알린 것.그는 이어 무대의 조명을 밝히게 한 뒤 “난 시간이 많다”며 참석자들에게 노트북을 덮어달라고 요청했다.이후 잡스는 프레젠테이션 중간중간 ‘와이파이 문제’를 재치있게 언급하며 참석자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