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IPO)가 그룹사들의 재무문제 해결사로 뜨고 있다. 공모청약 과정에서 신주발행 대신 구주를 매각해 상장하는 기업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압도적으로 많아졌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IPO로 조달된 자금이 상장기업이 아니라 대주주와 관계사 또는 재무적투자자(FI)들에게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IPO가 '성장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라는 고전적인 역할을 확장해 FI들의 '출구 전략' 핵심수단으로 활용되고 재무리스크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급부상 중인 셈이다.

◆구주 매출 IPO가 대세

10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구주매출 방식의 IPO 규모가 신주모집 방식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유가증권시장 IPO 공모액 2조1540억원(13건) 중 78.06%인 1조6815억원(6건)이 구주매출 방식으로 소화됐다. 올해도 5월까지 구주매출 방식이 5조7083억원(4건)으로 전체 7조6483억원의 74.64%를 차지했다. 이는 지금까지 신주 모집을 통한 IPO가 압도적이었던 것과 뚜렷이 대조되는 움직임이다. 2008년의 경우 구주매출 IPO가 한 건도 없었다.

2002년까지는 일부 공기업 외에는 구주매출 IPO가 불가능했다. 상장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게 IPO 취지에 맞다고 판단해 금융감독원이 구주매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규제는 2003년(코스닥시장은 2007년)에 IPO 활성화라는 명분에 따라 풀렸지만 이후에도 신주발행 IPO가 대세였다.

하지만 작년 9월부터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5904억원 규모 공모를 전량 구주매각으로 진행한 진로가 대표적이다. 하이트의 진로 인수 때 FI로 참여했던 군인공제회 교직원공제회의 지분을 팔아 풋백옵션(매도청구권) 부담을 해소한 것이다.

삼성생명도 삼성차 채권단 보유지분을 IPO를 통해 전량 매각,골치아프게 꼬여 있는 삼성차 채권환수 소송의 해결 발판을 마련했다. 또 대한생명은 대주주 지분과 함께 예금보험공사 지분 일부를 파는 데 성공했다. 이들을 포함해 최근 1년 새 구주매출을 활용한 IPO 사례는 10개사에 이르고 있다.

조광재 우리투자증권 IPO팀장은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했던 대기업들이 구주 매출 IPO를 활용해 FI들에게 부담해야 하는 풋백옵션을 해소하고 현금을 확보하는 추세"라며 "IPO가 FI들에겐 출구전략의 길을 열어준 셈"이라고 설명했다.



◆'출구 전략'용 IPO 줄줄이 대기

이 같은 출구전략용 매머드급 IPO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주관사 선정을 앞두고 있는 하이마트의 상장 추진도 대주주인 유진그룹의 유동성 숨통을 틔워 주기 위한 성격이 짙다. 유진그룹은 2008년 하이마트를 1조9500억원에 인수하면서 상당 부분을 인수금융을 통해 조달했다. 유진은 이번 공모에서 구주매출 방식으로 FI 부담을 덜어내고 2013년까지 순차적으로 모든 빚을 상환한다는 계획이다.

상장계획을 밝힌 두산엔진도 구주 매출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두산중공업이 대주주(지분 53%)인 두산엔진은 삼성중공업(15.7%) 대우조선해양(9.0%) 등이 주주로 올라 있다.

비상장기업이면서 올해 1720억원 규모의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단행한 LS전선도 구주매출을 활용한 IPO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상장을 추진하다 연기한 포스코건설 역시 대주주인 포스코 지분을 파는 방식으로 다시 상장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잇따른 M&A로 몸집을 키워 온 STX그룹은 세계최대의 크루즈선 조선업체 아커야즈(현 STX유럽)를 구주매출을 통해 해외증시에 상장시켜 인수자금 일부를 회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재두 거래소 이사는 "과거 상장을 꺼렸던 대기업들이 구주매출 방식의 IPO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어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광재 팀장은 "구주매출에 따른 IPO는 자금회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공모가격이 높게 책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