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국무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여권의 인적쇄신을 건의하려다 불발된 것으로 알려지자 그 배경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정 총리는 6 · 2 지방선거 직후인 지난 3일 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지만 이 대통령은 "흔들림 없이 국정에 매진해달라"며 만류했다. 사실상 선거책임과 관련해 이 대통령에게 재신임을 받은 셈이다.

이런 정 총리가 지난 9일 이 대통령과 독대를 갖고 '선(先) 청와대 개편 후(後) 내각개편'을 골자로 하는 국정쇄신안을 건의키로 했다가 무산됐다는 것이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파열음을 냈던 이회창 총리의 전철을 밟으면서 대권을 위한 '승부수'를 띄운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사실 정 총리는 지난해 9월 취임 일성으로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대통령 귀에 거슬리는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다. 정 총리의 한 측근은 10일 "총리께서 인적쇄신을 건의할 생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의 흐름과 한나라당 초선의원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여권 전면 쇄신론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여권 관계자는 "이번 선거를 통해 세종시 수정이 사실상 물 건너가면서 정 총리의 입지가 좁아져 있는 상황"이라며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 총리의 '쇄신 건의 거사설'에 대해 청와대와 총리실은 부인하고 있다. 총리실은 "지금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내각과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고 국정운영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정 총리는 이날 출근길에 '청와대에 쇄신을 요구할 계획이 있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신문을 안 봐서 모르겠다"고 하는 등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여전히 고민에 빠진 모습이다. 때문에 마음 속엔 쇄신 건의 방안을 담아뒀지만 청와대 참모들이 막아 이 대통령에게 실제로 말을 꺼내지 못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대해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전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주례보고 때 이 대통령과 정 총리가 차까지 마시면서 환담도 했는데 정 총리가 인적쇄신에 대해 건의하려 했다면 독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이 대통령은 각계에서 제기하는 쇄신 목소리를 주의깊게 듣고 있다"며 "모든 것을 열어놓고 고심하고 있으며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총리의 '쇄신 거사설'은 청와대와 총리실이 부인하면서 잠복했지만 이 대통령의 쇄신 방향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정 총리 거사설의 진원지가 친이(친 이명박) 측근 인사로 알려지고 일각에서는 배후설까지 등장하면서 현 청와대 참모진과 인적쇄신을 주장하는 당 · 정 핵심 인사들 간에 권력 쟁탈전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장진모/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