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경남 통영 '미래사와 한려수도'‥島島한 자태로 파도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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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빛과 물빛이 만나는 곳
'한국의 나폴리' 경남 통영에 닿는다. 통영이란 지명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미륵도를 건너 선로 거리 1975m,최고 초당 6m까지 가속할 수 있다는 한려수도 조망케이블카를 탄다. 생래의 고소공포증이 엄습해 왔다. 몸이 움찔했다. 애써 공포를 견디며 눈을 아래로 돌렸다. 한려수도의 섬들이 칡소떼처럼 무리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거대하고 눈부신 파노라마 앞에서 내 공포는 눈 녹듯 사라졌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400m가량 나무데크를 따라 올라갔다. 이내 산의 정상에 이른다. 저 멀리서 연화도,우도,욕지도,하노대도,상노대도,추도 등 숱한 섬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초여름 볕에 온몸이 나른한 모양이다.
선가의 방하착(放下着)이란 말이 떠올랐다. 방은 놓는다는 뜻이며,착은 집착 또는 걸림을 뜻한다. 제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은 채 털썩 물속에 주저앉아 방하착의 경지에 든 저 섬들은 얼마나 한가한가. 한산도(閑山島)란 섬 이름의 유래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섬들은 내 가슴 속으로도 몇 방울의 한가함을 흘려보내 주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한가해졌다. 때로는 사람도 외딴 섬이 되어야 한가해지는 것인가.
효봉 문중의 발상지 미래사
한가함이 게으름과 경계에서 만날 즈음 남쪽 기슭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탄다. 근대의 선지식 효봉 스님이 주석했던 미래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철저히 고요와 동행하는 산길이다. 30여분쯤 내려갔을까. 드디어 빽빽하게 들어찬 편백나무 숲에 가부좌를 튼 미래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맨 먼저 나그네를 맞은 것은 삼회도인문(三會度人門)이라는 현판을 단 문이었다.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 '삼회에 걸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미래사는 석두 · 효봉 두 스님의 안거를 위해 2~3칸의 토굴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불사를 시작해 1954년 대웅전을 낙성함으로써 가람의 모습을 갖췄다. 통영 항남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대원해보살이 화주였다. 이로써 미래사는 구산,법정,일초(고은 시인) 등을 상좌로 두었던 효봉 문중의 발상지가 되었다.
고은 시인이 효봉 스님을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고은 시인은 1952년,19세에 전북 군산 동국사에서 머리를 깎고 혜초 스님의 상좌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 혜초 스님이 느닷없이 환속하는 바람에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고 여기저기 행각승으로 떠돌던 끝에 이곳 미래사로 혜초 스님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을 찾아와 그의 상좌가 된다. 고은 시인은 1993년에 출간한 자전소설 《나,고은》 제2권에서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적는다.
'아,거기에 한국 조계종의 대종사 효봉 스님의 단좌(端坐)가 현실로 나타났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스님!'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나 울음 소리를 죽이느라 등짝이 흔들렸다. '그래,혜초가 나가고 네가 들어왔구나. 허,그놈들 잘도 나가고 들어오는구나. 어디 한번 생사를 해결해 보아!' 생사라.생사라.그날 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는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 앞에서 사자(師資)의 예를 마쳤다. '
효봉 스님(1888~1966년)은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인 최초의 판사가 돼 평양 복심법원(고법)에서 근무했다. 법관 생활 10여년,어느 날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난 뒤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일 수 있는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 길로 법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산천을 방랑하다가 1925년 금강산 신계사로 석두 스님을 찾아가 출가했다. 궁둥이 살이 짓물러 방바닥에 눌어붙은 줄도 모를 정도로 용맹정진했다. '절구통수좌'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고은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효봉 스님은 맹렬히 선풍을 떨친 것과는 달리 천성은 어린 아이 같았다고 한다. 자신에겐 엄격했지만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다. 오랜 참구를 통해 철두철미 아만심을 없앤 까닭이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 30권 속에는 '가야산 효봉 법어' '이름 꿈' 등 효봉 스님을 회상하는 여러 시편이 담겨 있다.
'ㅁ'자형 절집인 미래사 절마당엔 고즈넉한 나머지 적요가 한송이 꽃처럼 다소곳이 피어 있었다. 현재 이곳에는 네 분의 스님이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건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대웅전 앞,1990년에 세웠다는 부처의 진신치아사리탑인 3층석탑마저 따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다시 산을 거슬러 올라 하강하는 케이블카를 탔다. 내 눈 가득 담고 있던 쪽빛 남해 바다가 한차례 크게 출렁이는가 했더니 슬며시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여행의 끝에서 깨닫는 삶의 아이러니
'편지 생활자' 청마 유치환의 고향 통영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K.요사이 나는 남해안의 도시들을 여행하는 중이라네.문득 도회의 창틀에 갇혀 있을 그대가 떠오르더군.오늘은 통영 미륵도를 다녀왔다네.몇 년 만에 들른 미륵도는 여전히 56억7000만년 후에 민중을 구원하러 올 미륵을 기다리고 있더군.산 정상에 올라 삶의 막막함,정처없음,허덕임 그 존재의 덫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한가한 마음으로 한려수도의 섬들을 바라보았네.미래사에도 갔었지.왜 그리 뻔질나게 절집을 찾아다니느냐고 묻는가. 내가 틈틈이 고준한 정신의 세계를 거닐었던 선지식의 자취를 찾아가는 까닭은 내 영혼의 멘토가 그리운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여행이라는 게 본디 참 나를 만나러 떠나는 것 아닌가….'
안병기 여행작
● 찾아 가는 길
경(중)부고속도로 → 비룡JC → 산내JC → 통영대전고속국도 → 동통영IC → 통영대교 → 미륵도
케이블카에서 내려 400m가량 나무데크를 따라 올라갔다. 이내 산의 정상에 이른다. 저 멀리서 연화도,우도,욕지도,하노대도,상노대도,추도 등 숱한 섬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초여름 볕에 온몸이 나른한 모양이다.
선가의 방하착(放下着)이란 말이 떠올랐다. 방은 놓는다는 뜻이며,착은 집착 또는 걸림을 뜻한다. 제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은 채 털썩 물속에 주저앉아 방하착의 경지에 든 저 섬들은 얼마나 한가한가. 한산도(閑山島)란 섬 이름의 유래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섬들은 내 가슴 속으로도 몇 방울의 한가함을 흘려보내 주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한가해졌다. 때로는 사람도 외딴 섬이 되어야 한가해지는 것인가.
효봉 문중의 발상지 미래사
한가함이 게으름과 경계에서 만날 즈음 남쪽 기슭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탄다. 근대의 선지식 효봉 스님이 주석했던 미래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철저히 고요와 동행하는 산길이다. 30여분쯤 내려갔을까. 드디어 빽빽하게 들어찬 편백나무 숲에 가부좌를 튼 미래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맨 먼저 나그네를 맞은 것은 삼회도인문(三會度人門)이라는 현판을 단 문이었다.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 '삼회에 걸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미래사는 석두 · 효봉 두 스님의 안거를 위해 2~3칸의 토굴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불사를 시작해 1954년 대웅전을 낙성함으로써 가람의 모습을 갖췄다. 통영 항남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대원해보살이 화주였다. 이로써 미래사는 구산,법정,일초(고은 시인) 등을 상좌로 두었던 효봉 문중의 발상지가 되었다.
고은 시인이 효봉 스님을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고은 시인은 1952년,19세에 전북 군산 동국사에서 머리를 깎고 혜초 스님의 상좌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 혜초 스님이 느닷없이 환속하는 바람에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고 여기저기 행각승으로 떠돌던 끝에 이곳 미래사로 혜초 스님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을 찾아와 그의 상좌가 된다. 고은 시인은 1993년에 출간한 자전소설 《나,고은》 제2권에서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적는다.
'아,거기에 한국 조계종의 대종사 효봉 스님의 단좌(端坐)가 현실로 나타났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스님!'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나 울음 소리를 죽이느라 등짝이 흔들렸다. '그래,혜초가 나가고 네가 들어왔구나. 허,그놈들 잘도 나가고 들어오는구나. 어디 한번 생사를 해결해 보아!' 생사라.생사라.그날 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는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 앞에서 사자(師資)의 예를 마쳤다. '
효봉 스님(1888~1966년)은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인 최초의 판사가 돼 평양 복심법원(고법)에서 근무했다. 법관 생활 10여년,어느 날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난 뒤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일 수 있는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 길로 법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산천을 방랑하다가 1925년 금강산 신계사로 석두 스님을 찾아가 출가했다. 궁둥이 살이 짓물러 방바닥에 눌어붙은 줄도 모를 정도로 용맹정진했다. '절구통수좌'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고은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효봉 스님은 맹렬히 선풍을 떨친 것과는 달리 천성은 어린 아이 같았다고 한다. 자신에겐 엄격했지만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다. 오랜 참구를 통해 철두철미 아만심을 없앤 까닭이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 30권 속에는 '가야산 효봉 법어' '이름 꿈' 등 효봉 스님을 회상하는 여러 시편이 담겨 있다.
'ㅁ'자형 절집인 미래사 절마당엔 고즈넉한 나머지 적요가 한송이 꽃처럼 다소곳이 피어 있었다. 현재 이곳에는 네 분의 스님이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건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대웅전 앞,1990년에 세웠다는 부처의 진신치아사리탑인 3층석탑마저 따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다시 산을 거슬러 올라 하강하는 케이블카를 탔다. 내 눈 가득 담고 있던 쪽빛 남해 바다가 한차례 크게 출렁이는가 했더니 슬며시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여행의 끝에서 깨닫는 삶의 아이러니
'편지 생활자' 청마 유치환의 고향 통영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K.요사이 나는 남해안의 도시들을 여행하는 중이라네.문득 도회의 창틀에 갇혀 있을 그대가 떠오르더군.오늘은 통영 미륵도를 다녀왔다네.몇 년 만에 들른 미륵도는 여전히 56억7000만년 후에 민중을 구원하러 올 미륵을 기다리고 있더군.산 정상에 올라 삶의 막막함,정처없음,허덕임 그 존재의 덫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한가한 마음으로 한려수도의 섬들을 바라보았네.미래사에도 갔었지.왜 그리 뻔질나게 절집을 찾아다니느냐고 묻는가. 내가 틈틈이 고준한 정신의 세계를 거닐었던 선지식의 자취를 찾아가는 까닭은 내 영혼의 멘토가 그리운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여행이라는 게 본디 참 나를 만나러 떠나는 것 아닌가….'
안병기 여행작
● 찾아 가는 길
경(중)부고속도로 → 비룡JC → 산내JC → 통영대전고속국도 → 동통영IC → 통영대교 → 미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