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작품이 있다. 홍 감독의 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한 후줄근한 남자의 여정을 뒤쫓으면서 우리 사회의 우스꽝스러운 단면을 실감나게 드러내준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제목 그대로 전후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함부로 단죄하는가 하면 타인의 일상에 침범해 들어가고 책임지지도 못할 발언을 남발한다.

이 영화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선과 악,참과 거짓으로 선명하게 정리되기 힘들며 착잡하게 뒤엉킨 복잡다단한 현실을 애써 단순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임을 말해주고 있다. 감독은 사람들의 선입견이나 허위의식이 어떤 희극적 결과를 낳는지 보여줌으로써 씁쓸한 웃음을 유발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잘 알지도 못하고 저지르는 실수는 무수히 많으며 거기서 기인한 오해와 착각과 사고 역시 무수하게 널려 있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고 저지르는 실수는 꼭 일반인들만의 몫은 아니다. 때로는 위정자나 관료들이,또 때로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이 그런 어이없는 착오에 빠져 공동체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거나 역사를 오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일수록 흔히 사명감에 불타는 엘리트일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실존주의 바람을 일으킨 사르트르가 6 · 25전쟁을 남한이 북침해서 발발한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사실 관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과감한 주장을 했고 그 때문에 당시 서구 좌파 진영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박수갈채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카뮈나 메를로 퐁티 같은 보다 신중한 지식인들과는 불편한 관계가 됐다. 사르트르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서 사태를 파악하기보다는 자신이 신봉한 이데올로기에 비춰 멋대로 사실을 재단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사르트르의 후예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이 중국의 문화혁명에 보인 열광 역시 마찬가지 사례다. 필립 솔레르스,줄리아 크리스테바,장 뤽 고다르 같은 작가 사상가 영화감독 등은 정작 당시 중국 대륙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화혁명의 의미를 침소봉대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은 중국의 철부지 10대들이 권력의 철저한 통제 아래 수행한 난동이 러시아식 볼셰비키 혁명과는 다른 인류사적 구원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거기에 심취했다.

지금 보면 동의는커녕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런 장면들이 그 당시엔 대단히 진지하고 엄숙하게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지성들에 의해 연출됐다. 더욱 씁쓸한 것은 많은 대중을 오도한 그들의 이런 판단이나 행동이 대개 진보적 이념이나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쉽게 사면되곤 한다는 것이다. 6 · 25 당시 남침에 의한 전쟁으로 빚어진 그 숱한 비극에 대해서 혹은 문화혁명 당시 중국 대륙에서 희생된 숱한 사람들의 고초에 대해서 그들은 침묵했지만 이것을 가지고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잘 알지 못해서 용감할 수 있었던 그들이 훗날 잘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용서된다는 이 아이러니!

황우석 사태나 광우병 사태,천안함 사태 같은 국가적 이슈가 부각될 때마다 우리 사회는 찬반 양론으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인터넷엔 강호의 숨은 고수들이 출몰해 저마다 전문가연하는 식견을 늘어놓는다. 단정적이고 거침없는 그런 발언을 대할 때마다 내 속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이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혹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단정을 일삼는 것은 아닐까.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