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롯데리아 대표이사가 됐다. 1976년 롯데쇼핑 창립멤버로 입사해 줄곧 백화점에서 일했고 직전까지 롯데백화점 본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외환위기로 국내 경기뿐 아니라 외식업계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생애 첫 대표이사가 된 나는 밤잠을 설치며 롯데리아가 맥도날드 등 세계적인 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롯데리아는 국내 패스트푸드 시장의 절반가량을 점유하고 있던 1위 업체였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롯데리아는 고객에게 더 나은 만족을 주기보다 가맹점을 늘려 식재료를 공급하는 것에 만족하는 회사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제조업체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백화점에서 잔뼈가 굵은 나에게 롯데리아를 서비스 마인드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했다.

취임 후 3개월 동안 현장만 돌아다녔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와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전국 수십개의 매장을 직접 방문하고 살피다 보니 문제점이 눈에 보였다. 롯데리아의 주고객은 어린이와 중 · 고등학생들로 어른들은 롯데리아를 시시하게 여겼다.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는 정작 햄버거를 먹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가 구분없이 찾는 롯데리아','한국인의 롯데리아'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처음 고민한 것은 제품이었다. 매장 리뉴얼도 필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른과 한국인에게 통하는 차별화한 우리만의 '버거' 개발이었다.

때마침 국가차원에서 진행 중이던 '쌀 소비 촉진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저거다! 한국인은 벼농사를 짓고,쌀밥을 먹고,밥심으로 살아온 민족이다. 쌀로 햄버거를 만들어 보자.'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들에게 쌀을 친숙하게 하고 쌀 소비 촉진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고,우리 농촌을 살리는 버거.국내 사정에 밝은 토종 기업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쌀로 만든 번(bun · 버거의 둥글납작한 빵)을 개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쌀로 밥을 짓고 밥알이 흐트러지지 않게 만들려고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롯데리아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밤낮으로 매달렸다.

결국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멥쌀과 찹쌀을 적정 비율로 섞어 지은 밥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번'을 만드는 데 성공해 1999년 5월 '라이스버거'를 내놓았다. 라이스버거는 담백한 불고기 백반 맛이어서 어른들의 정서에 맞았다. 라이스버거는 출시 한 달 만에 약 80만개가 판매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라이스버거가 성공을 거두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김치를 활용한 버거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과 서양을 대표하는 음식을 접목시키기 위해 다시 무수한 실험을 반복했다. 무엇보다 김치맛을 살리면서 특유의 냄새를 없애는 게 관건이었다.

냄새가 적은 김치 엑기스를 사용해 라이스 번에 색깔과 맛을 입히고 김치 소스를 볶아 냄새를 차단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 생김치를 다져 만든 패티(햄버거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에 버터와 빵가루를 입혀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다.

2001년 8월 출시한 '김치 라이스버거'는 한 달 만에 250만개 이상 판매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김치버거는 특히 고객의 30%가 30대 이상일 만큼 중 · 장년층들도 많이 찾았다. 라이스버거와 김치버거는 롯데리아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고유한 콘텐츠를 서양의 대표적인 음식인 햄버거에 접목시킨 일종의 퓨전푸드다. 아이들만 먹는 음식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어른들도 즐겨 먹을 수 있는 햄버거를 만들어 롯데리아의 고객층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한 제품이다.

나의 최고경영자(CEO) 수업은 이렇게 롯데리아에서 시작됐다. 20여년간 백화점을 떠난 적이 없었기에 생소하고 낯설었던 그곳에서 제일 먼저 현장을 파고들었다. 그 현장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답을 구해 라이스버거와 김치버거를 탄생시켰고,세계 유수한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더욱 앞서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