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11 그리고 12'는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예선전이 열리는 17일 오후 8시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다. 영국,미국,이스라엘,프랑스,말리 등 여러 국적을 가진 7명의 배우들이 영어로 공연하는 탓에 자막을 사용한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16일 현재 예매율은 70~75%에 달한다. 20세기 현대 연극의 살아있는 전설로 꼽히는 피터 브룩(85)이 직접 연출한 연극을 국내에서 보는 첫 기회이기 때문이다.

'11 그리고 12'는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이후 영국 스페인 싱가포르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마친 작품.신비주의를 지향하는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 아프리카 수피즘 지도자였던 티에르노 보카(1875~1939년)의 생애에서 출발한 작품으로,그의 제자였던 아프리카 출신 작가 아마도우 함파테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2004년 브룩이 프랑스어로 연출한 '티에르노 보카'의 후속작이자 영어 버전이기도 하다. 영국인인 브룩은 "모국어로 연출하면서 훨씬 심도있게 탐구하고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1930년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서부의 말리 지역에는 수피즘 신봉자들이 '완벽의 진주'라는 기도문을 암송하면 지도자가 축언을 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원래 기도문을 열한 번 외워야 하는데 예배시간에 늦은 스승이 무안할까 봐 한 번 더 외운 것이 열두 번의 전통으로 굳어진 것.

스승이 죽자 열한 번 암송하는 기존의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과 열두 번이 타당하다고 믿는 세력 간의 싸움이 본격화되고 곧 대량학살이 자행된다. 무관용과 편협의 틀에 갇혀버린 종교적 믿음은 프랑스의 식민지배에도 이용된다. 두 파벌의 화해를 모색하던 보카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음을 맞이한다.

팔레스타인 출신 배우 마크람 J 쿠리(65)는 배우를 찾으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 브룩에 의해 주인공 '티에르노 보카' 역으로 발탁됐다. 쿠리는 "우리의 작품은 영적(spiritual)이며 보카 역을 맡으면서 사고와 삶의 방식이 변해 점점 자아(ego)를 버리고 신과 인간에 대해 겸허해졌다"고 말한다.

무대는 브룩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붉은 양탄자 한 장이 전부다. 20대에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연출가로 활약한 브룩은 사실적이고 웅장한 무대 세트와 의상,전통적인 규범과 모든 방법론에서 벗어나 셰익스피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각광받았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도 열린 공간에서 연극의 정수를 끄집어낸다. 공연기획가 정명주씨는 "한국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소리와 춤을 시작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의 연극 전통도 그렇다"며 "'매직 카펫'을 깔고 여기에 이야기꾼을 세우는 브룩의 연극은 이런 '빈 공간'의 미학"이라고 설명했다. 주연 배우 쿠리는 "브룩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고 연극의 순수함 그 자체에 도달할 때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믿는다"고 전한다.

"브룩은 '연기하지 말라,단순하게,덜 극적이지만 자연스럽게'라고 늘 강조해요. 양탄자는 강이나 사막이 됐다가 달이 되기도 하는데 아프리카의 자연을 상징하죠.모든 것이 열려 있어요. "

심지어 연기하는 각 나라의 극장마다 무대 크기도 제각각이라고 한다. 무대에 선 배우들의 울림이나 동선,걷는 속도와 보폭도 모두 변한다.

"작가와 연출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내 안의 휴머니티(인간애)를 덧입혀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현대인들의 삶은 소비적이고 복잡하고 바쁘지만 '진짜 삶'은 의외로 간단하지 않을까요?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서로 믿고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과'관용'이 바로 브룩의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

이 작품을 벌써 100번 가까이 공연한 쿠리는 "예술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털어놓는다. 공연이 끝난 후 1분가량 정적이 흐르는 순간,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고 브룩과 스태프들이 보내는 가치에 공감하는 순간은 마치 1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동시에 놀라운 전율을 준다는 것이다. 극중 보카의 대사가 이를 암시한다.

'두 개의 초승달이 얼굴을 마주하고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다가 마침내 둘이 만나 대진리의 완벽한 원형을 이루게 해야 해.그것만이 화합의 방법이란다. '17~20일 서울 LG아트센터.3만 · 5만 · 7만원 (02)2005-0114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