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한 영웅 이순신(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가까이 가기에는 너무 뜨거운 음악가 강마에(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는 루게릭병 환자 백종우(영화 '내 사랑 내곁에').

김명민(38)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기 어렵지만 어디엔가 있을 법한 인물들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새 영화 '파괴된 사나이'(감독 우민호 · 7월1일개봉)에서도 딸이 유괴된 후 타락했다가 다시 딸을 찾기 위해 사투하는 가장 역을 훌륭하게 해냈다.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목사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주영수란 배역입니다. 신실한 믿음을 지닌 가장이었지만 딸을 잃은 뒤 신을 버리고 아내와도 별거한 채 속세에 찌든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8년 뒤 유괴범으로부터 딸이 살아 있으니 돈을 다시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고 봉인됐던 부정(父情)이 깨어나 범인을 찾아 나섭니다. 주영수처럼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입체적인 캐릭터에 끌립니다. "

주영수 목사는 딸을 납치당한 뒤 더 이상 사랑과 용서를 외칠 수 없다. 그를 휘감은 정서는 유괴범에 대한 분노,딸과 아내를 잃은 상실감,납치된 딸을 방치한 데 대한 죄책감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다.

"살아있는 인간 같잖아요. 감정 폭을 넓게 펼치니까요. 입체적인 캐릭터는 밥을 먹을 때 여러 가지 반찬을 곁들인 느낌입니다. 한두 가지 성격만 보여주는 평면적인 캐릭터는 밥에다 김치만 먹는 것이나 다름없죠.요리사에 비유해도 마찬가지예요. 평면적인 인물이 한두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다면 입체적인 캐릭터는 많은 재료로 빚어진 음식입니다. (많은 재료로 인해) 요리사의 고민은 크겠지만 신날 것입니다. 이순신 강마에 백종우 등도 그렇게 창조한 캐릭터지요. "

엔딩 신은 인물의 복합성을 압축하고 있다. "아빠,저 한번도 잊은 적 없어요?"라는 딸의 물음에 그는 두 번의 미소로 답한다. 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거짓말이다. 그러나 방탕하게 살았던 그의 속내는 문드러진다. 김명민은 이런 이중적인 심리를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영화 내내 어둡고 고약했던 주영수의 얼굴 표정도 마지막에는 밝고 선하게 다가온다.

"딸을 찾고 가장으로 회복돼 가는 과정으로 마무리짓습니다. 유괴를 다뤘던 여느 영화들과 달리 희망을 주는 해피엔딩이 특징입니다. 선한 인간의 대명사 격인 목사의 궤적은 유괴가 얼마나 우리를 피폐하게 만드는지 선명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

주영수란 인물을 창조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모태신앙인 그가 자주 접했던 목사들의 모습에다 타락한 새 인물을 겹친 뒤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주영수는 허구가 아니라 어디엔가 실존하는 인물이라고 봤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배우인 제게 대신 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충 표현해선 안 됐죠.지난 다섯 달간 온통 그 사람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 직업에 대해 들이파고 그 사람 마음과 머리로 생각하고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업은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의미도 있습니다. "

목사에서 삼류 사업가로 변신한 주영수라면 어떤 눈짓과 제스처를 썼을까. 김명민은 스스로 유추해나가며 노트에 적었다. 올백 파마 머리에다 가죽 점퍼와 머플러,골덴바지와 랜드로버 신발 등으로 발로 뛰는 영업 사장 냄새를 풍겼다. 룸살롱에서 접대하거나 케이크 상자에 돈다발을 넣어 전달할 정도로 딜을 할 때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스스로 '목사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설도 하고 침도 함부로 뱉었다. 이로써'바닥을 굴렀구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기술만 가진 예술가는 별로예요.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받아들여 창조 작업을 계속해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피카소는 25세 때 명성과 부를 누렸지만 70세가 넘어서도 작품 세계를 변화시켰어요. 한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작품들이 다채롭습니다. 마지막 그림은 초등학생이 그린 듯 싶더군요.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시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했지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

김명민은 8월부터 차기작 '조선 명탐정 정약용' 촬영에 들어간다. 실학자인 다산 선생 역을 맡아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