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 A사에는 최근 실적이 악화된 부서의 인력을 줄이고 임원까지 바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사상 최대 실적을 즐기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다. 하반기 경영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주요 기업들의 표정은 여전히 활황세를 띠고 있는 거시경제지표와는 딴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승자독식'을 누려온 프리미엄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유럽의 재정위기 확산,환율 불안,해외 경쟁업체들의 노골적인 견제,노사관계 불안정 등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복병들이 도처에서 발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22일 하반기 전략회의 소집을 앞두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도 경영계획 수립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잘나가던 전자 "잔치 끝나간다"

LG전자는 유럽 재정위기의 영향으로 2분기 TV사업 수익성이 크게 나빠졌다. 업계에서는 당초 1800억원대로 예상됐던 영업이익 규모가 300억원대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분기에 비해 TV 수요가 줄어든데다 환율 상승에 따른 재고 평가손실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성과급(PS)을 못받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애플 아이폰4 대응을 위해 마케팅 비용을 대폭 늘리는 과정에서 수익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자업체 관계자는 "유럽 지역 수요가 부진한데다 국내업체들이 부품은 달러로 구매하는데 판매대금은 유로로 받다 보니 환차손까지 입고 있다"고 말했다.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반도체 사업도 경기침체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도체 업체의 한 관계자는 "4분기에 반도체 경기가 크게 꺾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수급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강자들의 반격

글로벌 금융위기에 내부 구조조정으로 몸을 추스른 해외 경쟁업체들이 거센 반격에 나서고 있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도요타,GM,포드 등 세계 주요 자동차회사들은 전열 재정비를 마치고 최근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에서 소형차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강점을 보여온 현대 · 기아자동차와 일전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TV 시장 왕좌를 한국에 내준 소니와 마쓰시타도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고 있다. 특히 소니는 구글TV를 가장 먼저 개발하며 인터넷TV 시장 선점에 나섰고 평판 TV 시장에서도 중저가 신제품을 내놓으며 점유율 확대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유로화 약세에 따른 유럽지역의 수익성 약화를 타개하기 위해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이 북미시장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하반기 북미시장은 사생결단식의 혈전에 가까운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 · 증설 등 중국발(發) 변수

유화업체들도 대규모 신 · 증설이 단행된 중국 공장의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다. 중국 최대 석유화학 기업인 시노펙의 자회사 ZRCC가 상반기 중 연간 100만t 규모의 설비 투자를 진행하는 등 올 한 해 중국 지역의 신 · 증설 규모는 192만t에 달한다. 이 지역의 신 · 증설 설비 가동이 본궤도에 오르는 연말까지 품질 격차를 더 벌리지못할 경우 국내업체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철강업계는 중국 시장의 성장세 지속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의 긴축정책 등으로 수요 감소가 이어질 경우 철강제품 가격 하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자국 철강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을 현재 44%에서 2015년까지 60% 이상으로 높이겠다고 선언한 것도 부담이다.

중국 내수부양 열풍에 올라탔던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중공업 등 굴삭기 생산업체들도 경기 둔화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두 회사는 최근까지 현지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하면서 국내 1년치 내수물량을 중국에서 한 달 만에 파는 등 선전해왔다. 두산 관계자는 "중국 경기 성장세가 정점을 찍고 수요가 둔화되면 곧바로 건설시장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시장상황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사관계는 어디로…

국내적 요인으로는 다음 달 1일 유급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 시행을 골자로 한 개정노동법 시행을 앞두고 노사간 긴장과 대립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최대 고민이다. 회사로부터 임금을 받고 노조 활동을 할 수 있는 '타임오프 대상자'와 관련해 사용자 측은 법에서 정한 인원 외에 더 둘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노동계는 노사가 합의하면 법정 인원보다 더 둘 수도 있다고 맞서고 있다.

실제 금속노조 산하 기아자동차 노조는 타임오프 문제로 회사 측과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기아차 노조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하는 오는 24~25일이 올 하반기 노동계 전반의 향배를 가름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하반기 중 본격화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금리인상 등 출구전략도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기업들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금호아시아나 대우자판 등은 물론 한진 동부 대한전선 유진 애경 등 지난해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은 기업들에는 출구전략 논의 자체가 부정적이라는 평가다.

김태훈/이정호/장창민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