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 CEO 경영교실] 부채표 활명수 장수 비결‥"임금님이 드셨대"…입소문 타고 '113년 국민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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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 두그릇 값 '고가전략'
'생명 살리는 물' 이름도 한몫
'생명 살리는 물' 이름도 한몫
'부채표 활명수'는 1897년 출시돼 113년 동안 서민과 애환을 같이하며 성장해 온 국민브랜드입니다. 2009년 매출 500억원,누적 생산량 80억병을 기록하며 현재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활명수가 100년이 넘도록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활명수의 역사와 성장과정을 보면 당시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파격적인 경영전략과 행보가 그 비밀입니다.
# 독립협회 발족 이듬해 개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져 민심이 흉흉하던 1895년.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 사태와 독립협회가 발족돼 일본에 대항하는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 1986년.그리고 당시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 선생이 활명수를 개발하고 동화약방을 창업한 것이 1987년이었습니다. 선전관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 간부 정도로 임금의 주치의들과 교류가 가능해 궁중에서 사용되던 활명수의 비방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이 개원되면서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의 간편성을 접목시킨 획기적인 제품으로 태어나게 됐습니다.
여기에 활명수 성공의 첫 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신제품이 성공하려면 화젯거리가 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활명수는 '궁중비방'이라는 확실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임금님이 드시던 약을 백성들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화젯거리였습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고 증폭되면서 제품의 인지도가 높아졌고,약품의 생명인 신뢰성 구축에도 크게 이바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두 번째로 신제품에는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약이라고는 힘들게 달여 먹는 한약뿐이었는데 활명수는 간편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병으로 된 용기여서 휴대하기도 쉽고 효력이 빨리 나타났습니다.
세 번째로 히트 상품에는 좋은 브랜드 네임과 브랜드 마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급체나 토사결란으로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활명수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란 뜻인데,약품으로는 최고의 이름이죠.게다가 확실하게 차별화된 브랜드 마크,회사의 로고이기도 한 부채표 로고를 통해 소비자의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되는 효과를 가졌습니다. 상표등록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100년 전,부채표와 활명수를 상표등록했던 놀라운 진보경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표이자 브랜드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M&A 사례 남겨
민병호 선생은 아들 민강을 초대 사장으로 취임시킵니다. 민강 사장은 독립운동가로서도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됩니다.
1919년 3 · 1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른 뒤 독립단체인 대동단에 가입,본격적으로 활동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독립자금을 대던 활명수'란 광고가 나오고 있는거죠.
이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여담이 있습니다. 당시 독립투사들이 활명수를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팔아서 그것으로 여비를 충당했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 활명수 성공의 네 번째 교훈,신제품은 가격도 전략적으로 책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활명수는 초기 고가 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그런 일화가 생겼습니다. 당시 한 병에 40전(지금의 1만8000원 정도) 이었는데,이는 설렁탕 두 그릇과 맞먹었다고 하니 서민들에겐 상당히 높은 값이었죠.그 덕분에 고급제품 이미지를 초창기에 심을 수 있었습니다.
민강 사장이 48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이 경영에 참여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독립운동 지원 기업의 명성을 이어줄 인사를 물색한 끝에 재계와 지식인층에서 훌륭한 인물로 평가 받았던 윤창식 선생이 사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M&A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윤 사장은 동화약방을 인수하자마자 회사의 업무 전반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조직을 개편하고 지배인에게 실질적인 경영권한을 주는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사규(社規)를 제정해 업무는 물론 급여,상여,퇴직금,출장비,휴일 휴가급 등 사원 복지 제도를 명문화했습니다.
또 만주국을 신시장으로 겨냥해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1937년 7월 부채표 활명수를 만주국에 상표등록을 하게 됩니다. 1938년 12월에는 만주 안동에 지점을 설치하고 장금산을 초대 지점장으로 임명합니다. 장금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약사로,당시 경영관행에서는 여성 인재를 기용한다는 것이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죠.좋은 인재가 있으면 열 번을 찾아가서라도 모셔오는 것이 동화의 인재경영 정신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1943년 만주 안동의 현지생산 공장 완공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한국 기업의 초기 해외진출 사례에서 아주 성공적인 모델로도 꼽히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회를 생각하는 기업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정부 수립 등 혼란의 시기였던지라 동화약방은 개점휴업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종업원들에게 급여를 계속 지급했습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경영은 훗날 종업원 지주제와 국내 최초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 도입으로 대를 잇게 됩니다. 동화의 경영자들은 항상 정직과 원칙을 강조해왔고,기업의 사회공헌을 국내 최초로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활명수의 성공을 있게 한 박애경영,정도경영 정신이었습니다.
1950년 6 · 25사변을 맞아 서울에서 마산으로 피난을 갔으면서도 동화의 사장과 임직원들은 '마산피난공장'을 가동했습니다. 그런 기업정신 때문이었을까요. 휴전 이후 서울로 복귀한 뒤 활명수의 승승장구 시대가 열렸습니다.
1962년 동화약품 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고 성장하던 중,활명수에 있어 가장 큰 위기였던 '까스명수'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까스명수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탄산이 들어있는 드링크였습니다. 코카콜라도 미군부대를 통해 국내에 흘러들어오던 때여서 소비자 입맛이 탄산으로 변하고 있었죠.동화약품은 2년 만에 '까스활명수'를 야심차게 출시했고 다시 2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역전시켜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게 됩니다. 워낙 잘 팔리다 보니 병을 구하는 것이 힘들어져서 병을 납품하던 회사를 아예 인수,직접 생산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82년 까스활명수의 생산실적이 100억 원을 달성합니다.
활명수의 파격적인 변화경영은 이처럼 지속성장을 가능케 했습니다. 113년의 세월 동안 활명수는 엄청난 시대적 변화를 겪었고,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 스스로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활명수로 하여금 113년을 살아남게 만든 비결이 됐던 것이죠.
정리=이주영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연구원
ope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