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고 괴로운 비 자꾸만 내려/ 밝은 해 나지 않고 구름도 걷히잖네/ 보리는 싹 나고 밀은 쓰러져/ 돌배와 산앵두만 살찌는데/ 촌 아이들 따먹으니/ 뼈 속까지 시다/ 쓰러진 밀 그대로인데/ 누가 이를 알 것인가. '<다산 정약용작 '장마'>

같은 일이라도 선험(先驗)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다르다. 장마도 그렇다. 한 달 남짓 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가 반가울 리 없는 건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래 된 단독주택에 살던 부모세대의 장마에 대한 기억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제때 손보지 못한 낡은 집에 살던 이들에게 장마는 지긋지긋했다. 녹슬어 구멍난 함석 처마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면 신발은 젖고 댓돌이나 쪽마루까지 물이 튀었다. 마루나 방에 비가 새 양동이를 받쳐놓는 일도 적지 않았다. 차라리 가운데가 새면 괜찮은데 틈 사이로 스며 벽지나 바닥이 젖으면 더더욱 난감했다.

비가 계속되면 사방이 눅눅하고 곰팡이가 생기는데다 빨지 못한 옷에선 땀냄새,세탁해 널었으나 마르지 않은 옷이나 수건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이러니 해가 잠깐이라도 나면 이부자리며 옷가지를 내다 말리기 바빴다. 형제가 여럿이면 살이 부러지거나 찢어지지 않은 우산을 챙기기 위해 학교에 먼저 가는 일도 있었다.

장마철이 다가왔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주부터 전국이 장마전선 영향권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소강상태지만 이번 주말이면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것이란 예보다.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 한다(뭘 원망하는지 분명하지 않게 입속으로 중얼거림)'는 말이 있듯 장마철엔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변한다.

때문에 기상청은 15일부터 1~3시간 후 날씨를 예보하는 '초단기 예보서비스'를 시작하고 태풍 예보도 72시간 전에서 120시간 전으로 앞당긴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제 시작이니 한 달 동안은 걸핏하면 비오고 눅눅하고 끈적끈적할 것이다.

때마침 2010월드컵 축구 기간이다. 나이지리아전에서 이겨 16강은 물론 8강 4강까지 오르면 지겨운 줄 모르고 지날 테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다들 괜스레 화가 나고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마가 지나고 나면 아무리 더워도 가을이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침수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고 빗길도 조심할 일이다. 집안 구석구석 습기 제거제도 좀 놓고.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