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5월3일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광란적 가톨릭 정책을 펴던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빈을 공격했다. 베오그라드에 집결한 오스만 군대의 국적과 인종은 각양각색.투르크인,아랍인,쿠르드인과 같은 무슬림 외에도 그리스인,세르비아인,불가리아인,세케이인과 서유럽의 잡다한 떠돌이 용병들까지 합세했다. 더 북쪽에 있던 헝가리의 퇴쾨이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헝가리에 주둔한 투르크군의 실제 투르크인 병사 비율은 5%에 불과했다. 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 사람들이 투르크 군에 복무했고,술탄이 파견한 최측근 협상가는 이탈리아인이었다. 투르크 군대의 절반 이상은 기독교도였던 것이다.

《십자가 초승달 동맹》은 지난 800년 동안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나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진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군사동맹을 다시 꺼내 보인다. 미국 조지아주립대 교수인 저자는 11세기 에스파냐,13세기 이탈리아,14세기 그리스,16세기 헝가리,19세기 러시아를 넘나들며 유럽의 전장에서 하나의 깃발 아래 싸웠던 기독교도와 무슬림 병사들의 생생한 전투현장으로 안내한다.

11세기 에스파냐는 다문화 · 다민족의 용광로였다. 400년간 지속됐던 무슬림 칼리프 체제가 무너지자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랍인들의 영역은 23개의 타이파(군소국가)로 쪼개졌다. 작은 타이파들은 서로 적대하며 북부의 기독교 지역에서 동맹세력을 구축했다. 칼리프 시절 이베리아 북부에서 겨우 생존하던 기독교 왕국들은 이런 정세를 이용해 처음에는 지원군으로,나중에는 정복자로 성장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제6차 십자군동맹의 총사령관이었던 프리드히리 2세는 가톨릭의 본산이자 유럽 문화의 심장인 이탈리아 한복판에 무슬림 군사도시 루체라를 건설했다. 루체라의 주민들은 원래 시칠리아에 살던 무슬림들로,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된 후 강제이주된 사람들.프리드리히 2세는 이들에게 이슬람 신앙과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 충성스럽고 유능한 궁수와 기병대를 확보했다. 루체라의 무슬림 병사들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롬르디아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제를 위해 진압에 투입됐고,십자군 원정길에도 따라 나서 같은 무슬림 형제들에 맞서 싸웠다.

동로마제국 말기,비잔티움은 지배층 내부의 파벌 싸움과 민중반란,거세게 밀려오는 이슬람의 진군으로 쇠락을 거듭했다. 비잔티움 엘리트들은 제국이 도시국가로 전락하고 있는데도 권력투쟁을 위해 투르크에서 군대를 끌어들였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칸타쿠제노스와 아이딘투르크의 술탄 우무르는 단순한 외교적 환대와 친절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술탄은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로부터 황제의 영토를 지켜줬고,칸타쿠제노스 황제는 자신의 딸을 우무르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을 정도였다.

저자는 다양한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동맹과 협력 사례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뿌리깊은 불신과 대립이 실은 조작되고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두 문명의 충돌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은 허구라고 지적하고 '문명화된 기독교 유럽'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라는 이분법의 파기를 요구한다.

몇 세기 동안 현재 우리가 아는 유럽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오랫동안 여러 종교와 문화가 공존해온,경계가 불분명한 공간이었다는 것.'유럽(Euroup)'이라는 단어는 '서쪽,암흑,뒤처짐'을 뜻하는 고대 셈어 '에레브(ereb)'에서 온 말로,'아랍(Arab)'의 어원과 같다고 설명한다. 또한 지난 수백년간 유럽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로 말하며 상대를 조금도 이상하게 보거나 다르게 보지 않았다고 상기시킨다.

그렇다고 저자가 이슬람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의 역사적 오류는 인정하되 사실을 왜곡하거나 역사적인 사실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와 같은 행위를 '유럽의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라고 규정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