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배우 김소현 "무대에선 그냥 크리스틴일 뿐…내 욕심은 버려야죠"
무대 밖에서 본 맨얼굴이 더 예쁘다. 까만 원피스에 하얀 피부.환한 미소도 싱그럽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여주인공 크리스틴 역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배우 김소현씨(33).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1154석 규모의 샤롯데씨어터를 가득 메우는 관객들이 연신 반할 만도 하다.

그는 이곳에서 지난해 9월부터 연일 흥행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 이상의 뮤지컬''세기를 넘어선 걸작''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무대 예술의 극치'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명작.2001년 첫 주연을 맡아 7개월 만에 24만명의 관객을 모았던 그가 이번에는 벌써 30만명을 열광시키며 새로운 뮤지컬 역사를 쓰고 있다.

공연 준비로 바쁜 그를 샤롯데씨어터에서 만났다. 1년 내내 거의 날마다 공연해야 하니 체력 소모가 크다. 그런데도 그는 공연 전에는 한 끼밖에 못 먹는다고 했다. "공연 4시간 전부터는 음료만 마셔요. 끝나고 나서는 많이 먹죠.다른 공연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는데 이 공연은 2시간 이상 에너지를 소진해야 하고 옷도 많이 갈아입고 해서 부담이 커요. "

무대 의상 중 제일 무거운 건 19㎏이나 되는 웨딩 드레스다. 급하게 갈아입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5명이 옆에 붙어서 도와줘야만 한다. 그래도 디자인을 잘해서 막상 입으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진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는 힘도 안 들어요. 9년 만에 다시 맡은 크리스틴 역이 너무나 좋거든요. 9월11일까지 1년간이나 하는 장기공연이죠.원래는 7월 말에 끝날 예정이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연장했어요. 그러고 나서 3개월간은 지방 공연이 있고요. "

그는 서울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성악도다. 대학원 1학기를 마친 뒤 우연히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첫 주연으로 발탁됐다. "그 땐 이렇게 큰 작품인 줄 모르고 하루 전에 원서 접수하고 천진난만하게 아리아를 불렀죠.뭘 알았더라면 긴장해서 탈락했을지도 모르죠.일본 연수 마치고 이탈리아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운명 같죠.신기해요. 공연 첫날 관객들의 엄청난 박수에 감격해서 뮤지컬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 때만 해도 뮤지컬계에 성악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죠."

실제로 '오페라의 유령'은 성악가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작품이다. 이 때문에 그의 팬들 중에는 '마니아'가 많다. 이번 공연만 100번 이상 본 사람도 있다. "직장에 다니는 29세 여성인데 볼 때마다 새롭고 감동적이라고 해서 저도 행복해요. 하루 두 번 공연 있는 날은 도시락 싸와서 함께 먹고 놀기도 합니다. "

그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2막 중 아버지 무덤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휘몰아치는 결말부다. "크리스틴이 여리고 여성스런 측면이 있는 반면 어려서부터 반(半)고아로 자랐잖아요. 아버지는 그녀에게 '프리마돈나가 돼라.내가 항상 너에게 천사를 보내주겠다'고 유언했죠.그래서 오페라의 유령을 그 존재라고 믿고 싶다가 실망도 하고,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기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 대목인데 그 힘든 말을 노래로 하니까 얼마나 슬픈지요. 가끔은 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 때문에 노래를 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마지막 노래 대사가 '안녕'인데 더 가슴이 저리죠."

무덤 앞에서 노래하는 장면부터 피날레까지 혼자 끌어가는 이 장면에서는 가끔 진이 빠질 법하다. 그러나 그는 "처음엔 잘하고 싶은 마음과 크리스틴의 격한 감정에 얽혀 숨이 찰 만큼 흥분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호흡을 놓치거나 그렇진 않다"고 말했다. 물론 성악과 달리 연기는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연기연습에 몰두한다.

장기공연인데 날마다 컨디션이 다르면 어떻게 극복할까. 그는 "열심히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욕심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했다. 자주 마주치지 않는 팬텀과는 일종의 연민과 사랑의 관계인데 몇 안 되는 장면에서 그걸 표현할 때 특히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를 공연하면서 윤복희 선생님께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선생님이 '덤벙아,그냥 그 사람이 되면 되지 않니,뭐가 어렵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오신 날 손도 까딱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공연보고 전화해서는 '잘 하고 있으니 떨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너 자신을 버리고 그 사람만 생각해라.그 사람이 여기서 어떻게 할지도 생각말고 그냥 그 사람이 돼라는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

몸이 아프면 어쩌나. "공연 들어가기 전까지 목에서 피가 날 것처럼 기침이 나다가도 무대 위에만 서면 신기하게도 안 나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그래요. "

그래도 어려움은 늘 있는 법.얼마 전에는 공연 중 손가락이 부러지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10년 배우생활하는 동안 한번도 다친 적이 없었는데 작년 11월 말 발이 얽혀 넘어지면서 왼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졌어요. 잘려서 날아간 줄 알았죠.연기는 계속 해야 하고 손은 차마 내려다 볼 수 없고,팬텀과 싸우느라 움직임이 제일 많은 신이었습니다. 옷도 가장 무겁고.팬텀이 면사포를 강제로 씌우는데 살짝 손가락을 내려다보니 다행히 붙어 있더라고요. 너무 아파서 악 소리도 안 났죠.눈물을 흘리면서 끝내자마자 매니저가 얼음 가져오고 응급실로 실려 가고….손가락 중간에 뼈조각이 떨어져서 날아갔더군요. "

그는 그 때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진짜 아플 땐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듯이 인생의 무대에서도 연기와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노인 역할을 할 때 누구나 허리를 구부리려고 하지만 원래 노인들은 허리를 자꾸 펴려고 한다는 것처럼.

'오페라의 유령'은 무대가 완벽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석 달 전 쯤에 식은땀 나는 일이 생겼다. 2막에서 팬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지하 미궁으로 끌려가는 장면에 무대 전환이 안 되고 배가 멈춰 버린 것이다. "음악은 흐르고 커튼이 쫙 열리면 배가 나가면서 팬텀이 소리지르고 해야 하는데 순간 너무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서 물 위를 걸어서 건넜죠.그 때 상대 배우와 정확하게 눈빛이 맞았어요. 그 순간 팬텀이 손목을 잡고 날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면서 위기를 넘겼죠.그런 위기를 겪으니까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 감정이입이 더 잘 되더군요. "

극중에서 팬텀의 질투와 라울의 사랑 사이를 오가는 크리스틴.그는 어떤 유형의 남자를 좋아할까. "전에는 장동건이 좋다 뭐 이런 이상형이란 게 있었는데 요즘은 돈이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외모도 중요한 것 같지 않고 친구처럼 길거리에서 떡볶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 같아요. 한강에서 사발면도 나눠 먹고,새벽에 전화하다가 만날 수 있는 그런 보통 사람."

그의 음악적 소질은 타고난 것인지도 궁금했다. "엄마가 성악을 전공했어요. 대학원 독주회 때 진통이 오는 바람에 저를 한 달이나 빨리 낳았대요. 어릴 때 바이올린 하다가 엄마의 강력한 권유로 저도 여동생도 성악 전공으로 바꿨죠.아버지요? 음치세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