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의 산증인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혼돈 속에 표류하는 우리 정치에 대해 명쾌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세종시 문제에는 "정치인들이 진정으로 충청권을 위하기보다는 표만 계산한 정략 탓"이라며 여야에 당략을 떠난 지혜를 당부했다. 세종시 수정안을 끝까지 반대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의리"를 강조하며 변신을 주문했다. 세종시 수정안이 국토해양위에서 부결된 다음 날인 지난 24일 이 전 의장을 한국경제신문 편집국 회의실에서 만났다.

▼세종시 문제가 여기까지 온 근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종시가 이렇게 된 건 전 · 현직 대통령 모두 책임이 있다고 봐요. 말로는 충청도를 위한다고 했지만 모든 정치인들이 충청도의 표만 생각했죠.나는 수도 분할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는 사람인데,이명박 대통령이 이걸 원안대로 하겠다고 대통령 후보 때 공약을 했단 말입니다. 그때 이걸 수정하겠다고 분명하게 얘길 해줬어야 해요. 또 수정으로 돌아섰을 때도 사실 박 전 대표를 미리 만나 설득 작업을 했어야 해요. 이걸 불쑥 정운찬 총리가 들고 나온 건 잘못됐지.결국 충청도민들은 수정안이 충청도에 더 유리하다 하더라도 '하도 많이 속았다. 다 필요 없고 원안대로 해달라'는 감정만 남게 됐다고 볼 수 있어요. 이걸 원만하게 풀려면 처음부터 정지작업을 하고 진정성을 갖고 천천히 해야 했는데 정치력이 부재했습니다. "

▼결국 박 전 대표가 원안 입장을 고수,여당 분열로 수정안이 부결되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의리와 신의를 지키겠다는 태도는 좋아요. 더군다나 오늘날 정치가 약속과 신의를 버리는 시대인데 그 정신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신의,의리라는 것은 나라 전체에 대한 신의,국민과 국가 전체에 대한 의리가 먼저입니다. 박 전 대표가 생각의 폭을 넓혔어야 했는데,좀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번 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국가백년대계를 위해서 잘못 약속한 건 번복하는 용기가 필요해요.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간의 갈등이 너무 심한 게 문제예요. 두 사람의 궁합이 안 맞는다고나 할까. "

▼수정안이 부결되자마자 +α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정안이 부결됐다고 정부가 +α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하는 건 옹졸한 자세예요. 물론 섭섭한 마음,원통한 마음은 이해가 가요. 그런데 정부가 옹졸하게 보이진 않아야지.이제는 정부,여 · 야 할 것 없이 세종시가 명실공히 자족도시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줬으면 좋겠어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느니 마느니 하는데 그건 기업에 맡겨야지 자꾸 인센티브가 없다는 얘길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 감정적으로 정치를 하는 느낌을 줘선 안돼요. "

▼야당은 처음부터 수정안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했는데요.

"무조건 반대하고, 대안도 없이 반대하고 걸핏하면 길거리에 나가고 그런 건 결국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해요. 길거리 데모하는 건 시민단체나 할 일이지 왜 자꾸 정당이 길거리에 나갑니까. 물론 야당을 원내로 끌어들이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건 여당 책임입니다. 수정안에 대한 본회의 표결 추진은 국회법 정신에도 어긋나요. 여당의 분열을 야기할 뿐 득될 게 없어요. 이제 모두가 다 한발짝씩 후퇴해서 신중하게 생각해야지요. 야당은 앞으로 정책 야당으로서,국민에게 대안세력으로서의 믿음을 줘야 해요. "

▼지방선거 얘기도 해보죠.민심의 본질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당이 참패한 이유를 꼽아보면 첫째 너무 오만하고 독선적이었다. 둘째 누구든지 기호 1번 공천만 받으면 당선된다는 생각 때문에 후보가 난립했다. 셋째 정부에 대한 견제세력들은 끝까지 투표를 했지만 보수성향의 투표자들은 '내가 안해도 되겠지' 하는 생각에 안했다. 넷째 여당이 지나치게 북풍을 이용하려다가 역풍을 맞았다는 점이지.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거예요. 젊은 세대와 서민들의 민심을 제대로 꿰뚫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지."

▼그렇다면 민심이 정권에 요구하는 건 무엇일까요.

"첫째 오만하지 말고 둘째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소통 정치를 하고 셋째 서민 경제를 살리는 데 치중하라는 것이죠.특히 한나라당은 청년들에게 희망과 꿈과 감동을 줘야 돼요. 그러려면 진정성이 있어야 되고 진심으로 애국하려고 해야 돼요. "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개편이 임박했는데요.

"대통령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용인술이야.월드컵 보세요. 허정무 감독의 용인술이 뛰어났다고들 하잖아요. 대통령은 무조건 지나치게 젊은 사람을 갖다놓겠다는 생각보다는 역시 노 · 장 · 청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능한 인재를 잘 발탁해서 쓰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제발 대통령 측근에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좀 썼으면 좋겠어요. 전부 대통령 기분 좋은 말 하는 사람만 쓰면 안돼요. "

▼대통령이 세대교체를 언급했습니다.

"참다운 세대교체는 물리적인 나이에 있는 게 아니고 의식과 마음의 변화죠.17대 국회 직전에 갑자기 여야 간 세대 교체가 많이 됐어요. 근데 17대 국회부터 비리 사건이 통계상 제일 많았다고.특히 18대 국회는 난장판 국회 됐잖아요. 심지어 소화기 뿌리고 해머로 문 부수고 하는 상상도 하지 못할 국회가 됐어요. 국제적으로도 조롱거리 국회가 된 건 지나치게 세대교체를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혈기가 왕성하니까 대화와 타협보다는 그런 행동이 앞선 거지."

▼도덕적 검증 잣대가 높아서 사람 뽑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지도층 도덕성에 문제가 많아요. 내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재벌에게 큰소리 칠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정치를 했어요. 17대 국회 들어 비리 사건이 너무 많아.돈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간다고요. 돈을 모으려면 처음부터 장사를 했어야지 왜 정치를 합니까? 사람 뽑을 때는 깨끗한 사람,바른말 하는 사람,국민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이 세 가지 기준만 있으면 됩니다. "

▼차기 대선 주자로 박 전 대표가 독주하는 상황인데요.

"사실이죠.근데 박 전 대표도 좀 생각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어요. 강온 양면을 잘 조화시켰으면 해요. 민주정치는 강경과 온건을 잘 조화해야 되는 거고,전진할 때와 후퇴할 때를 잘 판단할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걸 좀 더 연구해줬으면 해요. "

▼4대강 사업에 대해 야당 광역단체장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난 찬성하는 사람인데 왜냐하면 용수량을 확보해야 되고 홍수도 방지해야지,수질개선해야지.다만 그 속도는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년에 다 하겠다,임기 내에 다 하겠다 하지 말고 좀 천천히 말이죠.결국 대운하로 갈 거라는 오해가 있는데 오해 생기지 않도록 설득하면서 천천히 하는 게 옳다고 봐요. "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대통령 권한이 너무 세고 임기 내엔 아무리 잘못했어도 대통령을 바꿀 수가 없지.그래서 권력을 분산하는 방향으로 개헌하는 건 충분히 연구 검토할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 국회는 국민들 생각에 난장판 국회예요. 개헌을 논의하기 전에 국회부터 정상화하고,여당은 친이 친박 계파싸움부터 없애야지요. 이래 갖고 개헌이 되겠어요. "

▼후배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정치는 가슴으로 하는 것이지 꾀로 해선 안돼요. 정치와 사랑은 계산하면 안돼.사랑도 계산해서 결혼한 사람은 결국 다 파탄이 오죠.정치도 마찬가지로 '내가 이 말을 하면 대통령에게 점수를 따고 나에게 유리하다'고 계산해서 하는 사람은 결국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정치인들 제발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돼.돈 벌고 싶으면 차라리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하란 거죠."

정리=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이만섭 전 의장은…

이만섭 전 국회의장(78)이 처음 정계에 발을 들인 건 1963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서다. 2004년 3월 정계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무려 41년 동안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한 우리 정치사의 산증인이다. 6대부터 시작해 마지막 16대까지 여덟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직을 14,16대에 두 번이나 지냈다. 신한국당 대표 서리,새천년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등 그동안 4개 당을 거치며 최고 자리에 올라보기도 했다.

공화당에서 재선의원 시절엔 정권의 실세였던 이후락 ·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권력 남용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직언했다는 이유로 그 이후 두 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14대 국회의장을 맡았을 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날치기 사회 지시를 거부해 소속 정당인 신한국당 의원들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직권상정을 하지 않은 국회의장으로 기록됐다.

◆약력

△1932년 대구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6,7,10,11,12,14,15,16대 국회의원 △한국국민당 총재△신한국당 대표서리 △국민신당 총재 △새천년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제 14,16대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