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잊지못할 그 순간]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 "이라크서 '타운플랜' 첫 적용…8억弗 주택단지 세웠죠"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찾아도 없으면 닦아 가면서 나가면 된다. "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어록처럼 내 삶도 모든 순간이 도전의 연속이었다. 항상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뛰어야 했던 현대건설에서의 도전은 언제나 '미지와의 조우'였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했다.

1976년 현대건설에 들어온 이후 줄곧 해외건설을 맡아 왔다. 숱한 해외 현장 중 꿈에도 잊히지 않는 곳이 있다. 1980년대 초 이라크 사마라 · 활루자 지역의 대규모 주택공사 현장이다. 당시 중동 건설 붐이 사그라지던 무렵이라 회사는 이라크라는 신시장 개척에 전력투구했다.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선진 기업들과 경쟁을 벌인 끝에 사마라 · 활루자 지역 주택공사를 따냈다. 문제는 이후였다.

해외 도심 주거단지 건설 경험이 전혀 없던 터라 2800채의 대규모 주택단지를 'ㅈㄷㄷ'형태의 한국식 설계를 그대로 적용, 채광 좋은 남향으로 일렬로 세웠다. 설계도를 본 이라크 주택성 국장이 호통을 쳤다. "당신 회사에는 타운 플랜도 없습니까?" 부랴부랴 찾아본 유럽 업체들의 설계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단순한 주거공간을 뛰어넘어 입주자 교류를 고려한 광장이 있었고,이슬람 문화를 배려한 독특한 설계도 적용됐다. 도시 미관을 감안한 스카이라인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규모 타운공사를 처음 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고 매일 매일이 난관의 연속이었다. 1980년부터 83년까지 주택 외에도 학교 14개,사원 1개,기타 공공건물 23개를 시공하느라 휴가 한번 없이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도시공학을 적용했던 이라크 현장에서 코피를 자주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3년간의 노력 끝에 8억달러에 달했던 대규모 타운 공사는 후속 공사를 수주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수출유공훈장까지 받을 수 있었다.

현대건설의 프런티어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공사는 남극 세종기지 건설이 아니었나 싶다. 1987년 세종기지 프로젝트 책임을 맡은 뒤 현지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하 70도의 혹한,11월부터 2월까지 4개월 안에 공사를 마쳐야 하는 촉박한 공기,지구 반대편으로 옮겨야 하는 어마어마한 물자와 인력까지….1987년 10월 3000t의 바지선 HHI-1200호에 선적된 기자재는 50여대의 컨테이너와 30여종의 건설 장비를 포함해 부피가 약 1500㎥에 달했다. 현지 상황을 고려해 미리 가설한 구조물이 실렸고,고장에 대비해 여벌 장비까지 챙겼으니 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88년 2월 준공식까지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치의 오차라도 생겨 공사에 차질이 생기면 200여명의 현장 직원들이 오지에 갇힌다는 걱정에서였다.

적도기니라는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진행한 상수도 공사도 잊기 힘들다. 적도기니는 인구 63만명의 작은 국가이지만 풍부한 자원 덕택에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달러를 바라보는 부국이다. 하지만 정수되지 않은 흙색의 물을 그대로 마시는 통에 수인성 전염병에 시달려왔다. 현대건설 계열사인 현대엔지니어링은 이곳에서 100억원 규모의 소규모 상수도 공사를 진행 중이었는데,물탱크에서 물이 새 항의를 받고 있었다. 2007년 현대엔지니어링 사장으로 취임한 뒤 업무 파악도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날아갔다. 오비앙 적도기니 대통령을 만나 폭탄선언을 했다. 보수공사 정도가 논의될 걸로 알았는데 계약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 물탱크를 무료로 재공사하겠다고 다짐한 것.회사 매출을 감안하면 무모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신념으로 약속을 지켰고 설계에도 없던 고가 수조까지 지어 도시의 랜드마크로 만들었다.

지금도 적도기니 몽고모시의 상수도 고가수조에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모 마리아상이 세워진다.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적도기니 국민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정수장이 성지처럼 된 것이다. 이후 몽고모 하수장,에비베인과 에비마잉의 상 · 하수도 등 3건의 공사를 수주했다.

최근 젊은 직원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에 감탄하게 된다. 그들의 결정 뒤에는 확실한 근거 자료나 과학적 계산이 뒤따른다. 하지만 신중한 접근으로 더 큰 도전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1965년 첫 해외 진출에서 지난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놀라게 만든 현대건설의 행보에는 불확실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