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바다/돛 올리면 집 밖은 전부 길/닻 내리면 바로 거기가 내 집인 것을…/고원의 모래 알맹이들이여/시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느냐…/물 한 모금의 자비와/짚신 한 켤레의 보시/자,또 한 끼 얻어먹었으니 길 떠나자.'(이승하 '고원에 바람 불다-혜초의 길 1')

신라 스님 혜초(704~787)는 1200여년 전 광막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천축국(天竺國)으로 갔다. 요즘으로 치면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다. 그곳을 둘러보며 종교와 풍속,문화 등을 차근차근 기록했다. 승려 3000여명이 매일 공양미를 15석이나 소비하는 큰 사원,절을 짓는데 코끼리와 아내까지 시주하는 독실한 신자,나체로 생활하는 사람들,여러 형제가 한 사람의 아내와 같이 사는 모습 등 다채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5개의 천축국을 다닌 기록,즉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이야기다.

책이 나온 시기는 727년.한국인이 쓴 첫 해외여행기이자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7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3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14세기)와 함께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여행기로 꼽힌다. 책은 한 권의 두루마리 필사본이다. 총 227행에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은 5897자.가로 42㎝,세로 28.5㎝ 크기의 종이 9장을 붙여 만들었다. 총 길이는 358㎝다.

이 귀한 여행기는 오랜 세월 둔황 막고굴의 장경동에 다른 문서들과 함께 묻혀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폴 펠리오가 동굴을 지키던 수도자로부터 사들인 후 이듬해 공개해 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혜초가 신라인이란 것은 1915년 일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가 '대일본불교전서'에서 고증하면서 통설로 굳어졌다.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우리말 해제를 붙여 소개하면서 알려졌다. 하지만 원문이 3분의 1 이상 없어진 상태여서 책 성격과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왕오천축국전이 오는 12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실크로드와 둔황전'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무려 1283년 만의 귀향이다. 젊은 시절 미지의 땅을 거침없이 떠돌았던 혜초의 구도정신과 개척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이렇게나마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만나게 된다니 반갑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