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점 통해 가이드라인 제시
당장은 제조사가 영향력 행사
중장기적으론 가격 하락 예상
신라면은 평소보다 7배 넘게 팔려나가며 '조기 품절 사태'를 빚었고 이마트는 추가 공급을 요청했지만 농심에선 "공급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이마트의 신라면 가격 인하는 물량 부족으로 '한 달 할인 행사'로 끝났다.
◆가격주도권,제조업체에서 유통업체로
대형 유통업체와 식품 제조업체 사이의 가격결정 주도권을 둘러싼 '제 · 판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신라면처럼 시장점유율 1위인 '빅 브랜드'의 경우엔 그나마 제조업체의 영향력이 남아 있지만,나머지 상품들은 대형마트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제조업체들이 소비자가격을 통제하는 대표적인 수단은 상품 겉포장에 표시되는 '권장(희망) 소비자가격'(이하 권장가격)이다. 제조업체들이 자체 대리점망을 통해 공급하는 동네슈퍼나 편의점 등의 판매가가 될 뿐 아니라 대형마트의 납품가 기준 역할을 해왔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그동안 '빅 브랜드'들은 권장가격의 일정 범위 내에서 대형마트의 '가격 하한선'을 정하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판매가격을 관리해왔다"며 "이마트가 이 마지노선을 무너뜨리려고 하자 제조업체들은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공급 제한으로 맞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장가격 표시가 금지되는 '오픈프라이스'(판매가격 표시) 제도가 시행되면 가격 주도권이 식품 제조업체에서 대형마트 쪽으로 빠른 속도로 기울 것이란 전망이다. 올 들어 식품업체들이 서둘러 가격을 인상한 것과 달리 대형마트들은 한결 느긋한 입장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식품업체들은 2~3개월 전 동네슈퍼 · 편의점의 아이스크림과 과자값을 올리면서도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공급가격은 대부분 올리지 못했다. 김상범 이마트 제과 바이어는 "제조업체들은 우선 권장가격 인상을 통해 동네슈퍼나 편의점의 공급가격을 올린 후 대형마트와 가격협상을 벌여 왔다"며 "제조업체로선 권장가격이 없어지면 대형 유통업체에 대한 납품가격을 인상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유통업체들의 가격인하 압박이 거세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제조업체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이다. 제과업체 관계자는 "대형마트들이 자체상표(PB) 제품을 확대하면서 납품가격 인하 요구가 심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식품업체,대리점 장악력 약화될 듯
이번에 오픈프라이스가 시행되는 라면과 과자 빙과류 아이스크림은 대형마트보다는 동네슈퍼나 영세 소매점 등에서 판매되는 비중이 훨씬 높은 품목들이다. 롯데제과나 농심 빙그레 등 식품업체는 이들 중소형 소매점을 대상으로 오랜 기간 자체 대리점망을 통해 영업하면서 기반을 다져왔다. 따라서 권장가격을 대체하는 '가이드라인' 제시를 통해 중소형 소매점에 대한 식품업체들의 가격 영향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형마트의 가격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중소형 소매점을 관리하는 대리점에 대한 식품업체들의 장악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시각도 있다. 소비자들이 대형마트 등에서 판매되는 가격을 정상가격으로 인식하고 더 비싸게 파는 중소형 소매점을 외면하게 되면,가격 경쟁력을 잃은 대리점이 식품회사의 그늘에서 이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구매 파워에 따라 마진율을 달리 매겨 가격을 차별화하는 대리점들도 나타날 것"이라며 "결국 대형 유통업체의 영토 확장으로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전속 대리점 시스템의 붕괴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송태형/김철수 기자 toughlb@hankyung.com
[용어풀이] 오픈 프라이스
제조업체가 제품 겉포장에 권장(희망) 소비자가격을 표시하는 것을 금지하고,유통업체가 최종 판매가격(단위가격)을 정해 표시하도록 한 제도다. 권장 가격을 실제 판매가격보다 부풀려 표시한 뒤 할인해서 팔거나,대리점 등에 설정한 가격 이하로 재판매하는 것을 막아 가격경쟁을 제한하는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1999년 첫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