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도처에서 오랫동안 군림하던 공룡들이 중생대 말기(약 6500만년 전) 갑자기 사려졌다. 그 원인을 두고 소행성 충돌설,화산 폭발설,곤충이 매개한 질병설 등 의견이 엇갈리지만,여건변화에 적응하기에 몸 덩치가 부담이었을 공산이 크다. 민첩해야 생존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만든 제도 역시 그러하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적 금융위기는 중대 사건이다. 경제에 있어 금융의 역할,금융회사의 경영철학 및 행태,지배구조,대(對)고객관계 등 전반적 반성과 변화가 절실히 요청된다. 한국 금융은 이 같은 시대적 요청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금번 위기의 교훈은 금융이 실물경제를 앞지를수록, 복잡해질수록 위협이 크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의 경우 개별 은행 자산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을 초과할 정도로 늘어난 금융 비만증의 위험을 보여준다. 미국 서브프라임 부동산채권의 경우 파생상품의 복잡성이 초래한 지독한 도덕 둔감증을 드러낸다.

한국은 아직 금융 공룡을 꿈꾸고 있다. 은행들을 합병해 세계 랭킹을 높이고 원전설비 수출금융을 담당할 은행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몇 년에 한번 있음직한 대형 프로젝트라면 국내외 은행들의 신디케이션으로 풀면 된다. 세계 랭킹이 높은 것과 우량하다는 것은 다르다. 은행 랭킹은 자산규모,시가 총액 등 기준으로 매겨지고,수시로 뒤바뀐다.

2006년 10월 홍콩과 상하이에서 동시 상장하면서 중국 공상은행이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은행으로 떴다. 세계 최우량 은행이란 뜻은 아니다. 2004년 말만 해도 19.1%에 이르렀던 부실대출을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통해 한 해 동안 5% 미만으로 축소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2008년 위기 발생 이후 산탄데르 은행을 비롯해 잘 버텨온 스페인 금융계가 올해 저축은행들의 부실이 불거지면서 위기에 몰리고 있다. 여전히 잘 버텨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캐나다 은행들이다. 캐나다에는 2009년 말 현재 21개 국내은행들이 있지만 소위 '빅 파이브'라는 5개 은행이 시장을 주도한다. 건전성과 유동성이 높고 영업실적도 우량하다. 한때 미국 금융계로부터 '제3세계 은행'이라고 조롱 받았지만 현재는 그들보다 우월하다. 캐나다 경제규모가 한국보다 작지만 한국보다 은행 수가 많은 편이다. 세계 랭킹을 노리고 헛수고하는 은행은 아예 없다.

그들만의 이윤,그들만의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은행들은 퇴출되어야 한다. 실물기업과 가계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하는 은행이어야 번창한다. 그렇게 되도록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시장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국내 은행을 몽땅 한데 뭉쳐봐야 세계 랭킹 30위권에 끼기도 어렵다. 이 숫자놀음에서 얻는 어떤 '심리적 쾌감'이 있을지 몰라도 독점은행 등장으로 질식되는 경쟁과 그에 따른 서비스 질적 저하 등 실질적 손실을 보상할 수 없다.

국내 대형은행 두 개를 만드는 통합작업을 주도해 본 필자의 경험에 비춰보면 합병 이후 문화통합에 실패하면 통합 전 작은 문제들이 통합 후 보다 큰 문제로 고질화된다. 국내 은행들의 문제 핵심은 외형 규모가 아니라 내부 경영의 철학,행태,지배구조에 있다. 내부역량이 축적되고 넘쳐야 비로소 외형 키우기와 국제화 등을 실속있게 추진할 힘이 생긴다.

스페인처럼 한국 금융의 고질병은 저축은행에 자리한다. 이름만 '은행'으로 바뀌었을 뿐 '금고' 시절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부동산 관련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수술하는 시늉을 했다. 언 발에 소변 누기일 뿐이다. 정책당국이 안으로 낮게 눈길을 돌려야 금융이 실하게 자란다.

김병주 <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