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하락 등으로 힘을 얻던 쌀 조기 관세화(시장 개방)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불발될 처지에 놓였다. 내년부터 관세화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3개월 전인 오는 9월말까지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해야 하는데도 정부는 농민단체들의 합의에만 의존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내년에도 쌀 의무수입량을 2만여t 더 늘려야 할 상황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4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농민단체들의 협의기구인 농어업선진화위원회 쌀 특별분과위원회는 이달 중순 전남 광주와 충남 대전을 끝으로 작년 말부터 시작한 쌀 조기 관세화 전국 토론회를 끝낼 예정이다.

농식품부는 전국 토론회를 거쳐 합의된 내용을 통보받아 조기 관세화 추진 여부를 최종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토론회에서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점이다. 농민단체들은 시장 개방에 앞서 쌀 직불제 강화 등 종합적인 쌀산업 육성책을 마련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농식품부는 예산문제 등을 들어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양측의 합의없는 무의미한 토론회만 계속 열리고 있는 셈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농민단체들의 최종 합의가 없다면 경제적 실익을 포기하더라도 조기 관세화를 추진하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농업 전문가들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조기 관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농민단체들이 합의를 해야 추진하겠다는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민간 농업연구소 GS&J의 이정환 이사장은 "농민단체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지만 정부 태도가 더 문제"라며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농민단체의 합의가 있어서 추진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박동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지금은 정부가 일부 농민단체들의 반발에 너무 신경을 쓰기보다 추진하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조기 관세화 불발에 따른 모든 책임을 농민단체에 떠넘기려는 '보신주의'의 전형이라는 지적도 있다.

곽길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정책국장은 "쌀시장 개방은 농민은 물론이고 국가 전체적으로 큰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사안인데 농민단체들의 합의에만 맡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쌀 조기 관세화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2014년까지 유예돼 있는 쌀시장 개방 시기를 앞당기자는 것이다. 한국은 2004년 우루과이라운드(UR)재협상으로 2014년까지 매년 수입물량을 2만t씩 늘리며 가뜩이나 국내에서 넘쳐나는 쌀 가격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