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따지기의 달인
김 과장은 성격이 낙천적이다. 이런 그도 팀장을 보면 울화가 치밀곤 한다. 팀장의 별명은 '왕소심 마왕'.상사에게는 눈길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만큼 쩔쩔맨다. 하지만 밤샘 작업에 시달리는 팀원들에게는 '아이디어를 내라'고 닦달한다. 이런 이중성에 김 과장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참다못한 김 과장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가 찾아낸 묘책은 '더블 리포트'.팀장이 상사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만들 때 진짜와 가짜 보고서를 둘 다 만들기로 했다. 완벽한 보고서를 미리 만들어 놓은 뒤 팀장에게는 가짜 보고서를 먼저 올렸다. 엉터리 보고서에 밥도 못 먹고 말까지 더듬는 팀장을 볼 때 그는 속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김 과장 · 이 대리들이 직장생활에서 겪는 고충 대부분은 상사와의 관계에서 나온다. '아무리 좋은 상사라도 없는 게 훨씬 낫다'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참을 인(忍)자'를 수십 번 새기다가도,'욱'하고 치솟는 걸 참지 못할 수도 있다. 아찔한 항명의 유혹이다. 그러나 어설픈 '항명'은 화를 부른다. 험난한 인간관계를 헤쳐 나가고,장수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개김의 노하우'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녀 별명은 '정색녀'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 대리(33 · 여)의 별명은 '정색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그건 아니죠"라며 정색을 하고 따지기 때문이다. 상사 · 후배를 가리지 않는다. 이 대리는 "상사에게 직언하는 성격 탓에 상사로부터 예쁨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리에게도 고민은 있다. '정색녀'라는 별명 덕에 온갖 회사 내 불평불만 접수 창구가 되어 버린 것.그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은 내가 대신 상사에게 얘기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지만,그런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 회사 내 '공식 총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전했다.
이직을 앞두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기어 오르기'를 실행하는 경우도 있다. 교육업체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3)은 이직하기 직전 연차 휴가를 몰아서 썼다. 이직이 확정됐지만 아직 직장에 알리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아하게 여긴 팀장이 "요즘 너무 자주 연차 쓰는 것 아니야 ? 일도 설렁설렁하는 것 같고 이상해"라고 지적한 건 당연했다. 그는 "연차는 개인의 권한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월급받는 만큼은 일 다 하고 있습니다"라며 당당히 말했다.
◆때론 우회 전술이 효과적
대기업에 다니는 박모 차장(35)은 몇 년 전 상사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대든'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과장이던 박씨는 부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장은 리더의 네 가지 유형 중 가장 나쁘다는 '부지런하고 무능한' 타입이었다. 그러다보니 박 차장은 의미 없는 업무,비효율적인 업무에 자주 내몰렸다.
박 차장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결국 경영진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상사의 무능과 비도덕성을 비난하는 투서였다. 그는 "A4 세 장에 걸쳐 그동안 억눌렀던 모든 말을 털어 놓으니 속이 시원했다"고 회상했다. 투서 말미에 그는 부서이동을 요구했다. 그리고 요청이 받아 들여졌다. 박 차장은 "직접 상사에게 대들었으면 부서이동도 못하고 괴롭힘만 당할 뻔 했다"며 "투서 내용을 확인한 상급자가 비밀만 지켜준다면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대동단결해 팀장 몰아내기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안모 대리(31)는 팀원의 대동단결로 무능한 팀장을 '업무적 한정치산자'로 만들어 버린 적이 있다. 안 대리의 팀에 새로온 팀장은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능력이 달렸다. 자존심까지 셌다. 수년간 업무를 진행하며 잔뼈가 굵은 차장급들의 조심스러운 건의조차도 묵살해 버렸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났다. 팀원들은 살길을 찾아야 했다. 이들은 정중한 무시전략을 선택했다. 팀장을 정중하게 대하되 실제 지시는 가장 업무에 정통한 차장으로부터 받았다. 다행히 차장은 팀장보다 입사도 빠르고 나이도 많았다. 팀장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저 '씩씩'거릴 뿐이었다. 그러기를 또 두 달여.팀장은 자신이 뒤로 빠진 채 팀원들이 움직일 때 성과가 좋다는 걸 인식했다. 드높던 자존심도 꺾였다. 풀도 죽었다. 팀장은 결국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원해서 다른 팀으로 옮겨가 버렸다. 안 대리는 "무능한 팀장 때문에 인센티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들 필사적이었다"며 "치사하긴 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술자리는 '복수'의 장?
술자리를 상사에 대한 '개김'의 장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자산운용사에 다니는 이모 대리(31)는 회식때 직장 상사들의 요주의 인물이다. 이 대리는 평소 마음에 담아둔 상사들에게 술자리에서 '복수'를 한다. 그의 무기는 '사랑하는 만큼'이라는 술잔.이 대리는 가장 먼저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만큼' 술을 따라 달라고 한 뒤 한번에 들이켠다. 그리곤 3명 이상의 상사들에게 '사랑하는 만큼'을 외치며 술을 권한다. 상사들로선 후배들이 '사랑하는 만큼' 따라준 잔을 마시지 않을 수도 없고,마시자니 양이 너무 많아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어쩔줄 몰라하는 상사들의 표정을 보며 이 대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중견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 다니는 최모 대리(33)는 술자리에서 상사에게 불만을 늘어 놓았다가 죽을 쑨 경우다. 그가 속했던 팀은 신생 부서로 인원이 많지 않았다. 사람이 적으니 업무량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은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내기 위해 팀원들을 채찍질하기 일쑤였다.
최 대리가 갖고 있던 불만은 부서 회식 자리에서 터졌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그가 팀장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늘어 놓은 것.당연히 다른 부서원들도 합세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선후배 및 동료들은 오히려 최 대리가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본다며 팀장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 사건 이후 최 대리는 회사와 동료들에 대한 애정이 싹 식어 버렸다. 결국 몇 달 뒤 이직을 택했다. 최 대리는 "술자리도 업무의 연속이라지만 그 자리에서까지 팀장에게 아부하는 동료들이 꼴보기 싫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새로 옮긴 회사에서는 어떤 술자리에서나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김동윤/이관우/이정호/이상은/이고운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