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자본론,그리고 일반이론,이 세 개의 저서는 세계 경제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 내용은 매우 방대하고 심오하지만 그 주장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경제 내에서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어떤 수준에서 설정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자유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상당 부분 강조한 쪽이 국부론이라면 계획경제를 통해 완벽하게 국가가 장악하는 경제운용을 주목한 쪽이 자본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케인스의 일반이론은 시장이 중요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 불안정성이 존재하므로 정부가 나서서 총수요관리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둘러싼 수많은 논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금융위기 이후 금융분야에 대한 각종 개혁작업이 진행되면서 시장보다는 정부 쪽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우선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된 미국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고 최근 상 · 하원 공통의 금융개혁안이 마련돼 시행될 예정이다. 또한 금융개혁 논의는 주요 20개국(G20) 수준에서 범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위기국면에서 서둘러 개최된 워싱턴 G20 정상회담에서 제시된 47개 과제는 금융분야의 주제를 거의 다 망라하고 있었지만 너무 세부적이었고 2009년 4월 런던 정상회담에서 과제들이 정리돼 제시되기 시작했다. 그 후 피츠버그와 최근의 토론토 회담을 거치면서 주로 바젤Ⅲ라 불리는 은행의 건전성 규제 및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대형금융회사(SIFI)에 대한 규제방안이 핵심 과제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각국의 입장에 따라 다른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은행세의 경우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들이 도입하기로 했고 캐나다나 중국은 도입하지 않을 전망이며 우리는 계속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도 자국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규제안을 다른 나라가 모두 따르도록 하기보다는 이를 하나의 모델케이스로 제시하는 수준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최근 거론되는 금융규제의 특징은 '따로 또 같이'의 움직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공통적 부분에 대한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동시에 각국이 자신의 입장을 반영,상이한 접근을 하는 부분도 공존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실 이번 금융위기가 금융종주국이라 할 만한 미국에서 발생하면서 우리는 일종의 '롤모델'을 상실했다. 그간 주로 미국 모델을 참고해 금융 정책을 수립하고 벤치마킹을 해왔던 만큼 앞으로도 과연 미국 모델을 따라가도 되느냐에 대한 회의가 싹트게 된 것이다. 물론 위기로 인해 미국이 힘들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금융분야의 경쟁력을 상당 부분 확보한 상황이므로 미국 모델의 폐기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섣부른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최근 미국의 규제도입 분위기를 그대로 벤치마킹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재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경우 금융부문이 위기의 근원지가 된 일이 없고 상대적으로 건실한 상태라는 점,실물부문이 양호한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그리고 남유럽 식의 재정위기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최근 정부는 금융회사 지배구조나 소비자보호기구 도입 등 다양한 규제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요성이 존재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규제 도입이 자칫 우리 상황에 비해 너무 앞서가는 것은 아닌지 혹시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분위기에 편승해 불요불급한 규제를 추가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위기는 새로운 규제 도입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때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 바른금융재정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