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개의 수명은 보통 40년이지만 어떤 솔개는 70년을 살기도 한다. 30년을 더 사는 놈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변신이 그 답이다.

장수하는 솔개들은 40년이 되면 고통스러운 변신에 나선다. 긴 세월이 흘러 마모된 부리는 스스로 바위에 찧어 부숴 버린다. 새 부리가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통의 과정을 통해 새로 날카로운 부리를 얻은 뒤에는 무거운 깃털도 뽑아 버린다. 피투성이를 감수하면서 더 가볍게 날 수 있는 새 깃털이 돋아나기를 기다린다. 사냥하기에는 너무 낡아버린 발톱도 같은 방식으로 뽑아 버린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솔개는 힘찬 비행에 나선다.

기업 경영에 이 같은 솔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기업의 쇄신이 '버림의 미학'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수기업의 공통점

지난 30년간 한국의 100대 기업 생존율은 20%에 못 미쳤다. 외국 기업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고통스러운 변화에 나서지 않거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잊혀져 갔다.

반면 50년,100년,200년을 넘겨 존속하는 기업들도 있다. 창업 연도가 1896년인 두산그룹은 100살을 훌쩍 넘겼다.

장수기업들은 70년을 사는 솔개처럼 지속적인 변신을 거듭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902년 광산회사로 출발해 포스트잇을 만드는 회사로,이어 세계적인 전자재료 업체로 변신한 3M(미네소타 마이닝 매뉴팩처링),200년을 이어온 나일론 사업을 하루에 접고 소재업체로 변신한 듀폰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한국에는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모직의 잇따른 변신이 눈에 띈다. 직물회사에서 패션회사,화학회사를 거쳐 전자재료 회사로 끊임없이 몸을 바꿔가고 있다.

◆위기를 넘기고

제일모직은 창업 40주년인 1994년 큰 위기를 맞았다. 4월30일 삼성물산이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를 흡수 합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업종 전문화 정책을 앞세워 그룹 계열사 수를 줄이도록 대기업들을 압박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물산과 제일모직에 나눠져 있던 패션사업을 물산에 몰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회사나 다름없다. 수많은 삼성의 인재들을 제일모직에서 배출했고 1954년 창립 이후 엄청난 돈을 벌어 그룹 확장에 기여해온 어머니와 같은 회사였다. 이 회장은 "모직은 삼성의 명예다. 그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과 계열사들이 갖고 있던 주식을 우리사주조합과 임원들에게 매각했다. 종업원 지주회사의 성격을 가미해 합병의 압박을 피한 것이다.

회사가 사라질 위기에서 벗어난 제일모직은 변신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국내 시장에 머무르고 있던 패션사업은 해외 진출을 가속화했고 10% 안팎에 이르던 화학사업의 비중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1995년에는 컴퓨터 모니터의 재료가 되는 ABS수지 개발에 성공해 모니터 시장 점유율 1위 달성의 기초를 닦았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독점하던 시장을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곧장 연소시 유해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합성수지 개발에 착수,1999년 세계 최초로 독자개발에 성공했다.

◆변신은 계속된다

제일모직은 10년에 한 번씩 사명을 바꾸려 했다는 말이 있다. 실제 사명 변경을 위해 컨설팅을 받은 적도 있다. 주력 제품이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골덴텍스를 대표로 한 직물이 주력 제품이었다. 1980년대에는 갤럭시를 비롯한 패션의류가 그 자리에 치고 올라왔고 1990년대에는 빈폴이 가세하며 대표상품이 됐다. 2000년대에는 ABS수지를 비롯한 화학부문이 패션의류를 밀어냈고 2010년에는 반도체 재료 등 전자재료 부문이 주력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1999년 전체 매출의 2%에 불과했던 전자재료 사업은 작년 28%로 뛰어올랐다.

이처럼 성공적 변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준비된 다각화였다. 1980년대 중반 패션,직물산업이 공급 과잉 조짐을 보이자 발빠르게 화학산업으로 눈길을 돌렸다. 연간 매출의 몇 배가 되는 돈을 투입해 1989년 여천공장을 지었다. 1994년에는 10년,20년 후를 내다보고 의왕사업장 내에 반도체 재료 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은 2010년대 제일모직의 주력 제품을 생산하는 전자재료 산업의 메카로 성장하고 있다.

앞서가는 기업들이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다 후발주자들에게 대표기업의 자리를 내준 '이노베이터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제일모직은 지금도 변신을 계속하고 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