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는 요즘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단골 견학처다. 유럽 기업들이 독점하고 있던 북해용 FPSO를 한국 조선소로는 처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FPSO는 바다위에 떠서 해저 석유를 뽑아내 저장하고 있다가 유조선에 전달하는 선박 형태의 해양 설비로,'바다 위 정유공장'으로 불린다. 삼성중공업이 건조중인 FPSO의 규모는 총중량 2만5600t,원유 · 가스 등에서 불순물을 태우는 시설인 플랫타워 높이가 145m에 달한다.

삼성중공업이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FPSO 시장을 개척한 덕에 올 하반기에 예정된 10억달러 안팎의 북해 대형 해양설비 프로젝트 2건도 한국 조선업체가 수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외국 선사들은 국내 업체들의 건조 비용이 유럽의 조선업체와 비교해 3분의 2 수준에 불과한 데다 납기를 정확히 맞추는 점 등에 주목하고 있다.

◆극지방용 해양설비 시장을 뚫다

삼성중공업이 2008년 7월,노르웨이 스카브 가스전에 투입될 FPSO를 수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해용 해양 플랜트는 노르웨이 아커야즈,영국의 AMEC 등 유럽계가 사실상 독식해 왔다.

2007년 무렵 시장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로열더치셸이 AMEC에 FPSO를 발주했다가 납기가 2년이나 지연되는 사태를 겪은 것이 계기가 됐다. 노조 파업과 더불어 유럽 조선소들이 요구하는 건조 단가도 너무 높아지자 선주들은 한국 조선소로 눈을 돌렸다. 김준철 삼성중공업 해양PM1팀 상무는 "유럽 조선소가 15억달러에 만든다면 삼성중공업은 10억달러에 건조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BP가 삼성중공업에 8억1000만달러짜리 북해용 FPSO를 맡긴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BP는 스카브 가스전에서 가스를 생산해 북해 연안까지 이송하는 전 과정에 대한 계약을 이미 체결해 놓은 상태였다. 만약 FPSO를 제때 인도받지 못하면 BP로선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 상무는 "2005년 전후로 삼성중공업이 해양 플랜트 분야에서 100% 공기를 맞추면서 납품한 것이 수주전에서 노르웨이(아커야즈),네덜란드(히레마),두바이(맥더못) 등의 경쟁자를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선주,감독관 200명 파견

삼성중공업의 북해용 FPSO 건조가 의미 있는 이유는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이 시장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군드룬,조르뵈 유전 등 올 하반기에 예정된 북해의 굵직한 프로젝트들도 한국에 문호를 열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국내 조선업체들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던 사업이었다.

한국 조선업계에선 처음 제작하는 터라 진행 과정에서 큰 애로를 겪었다. 북해용 FPSO는 극한의 추위에서도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티타늄이 함유된 특수 배관을 장착해야 하는데,용접이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보름이면 통과하는 용접사 자격 테스트에만 6개월이 걸렸다.

선체를 해상에 고정하는 장치인 17m짜리 터렛을 8단계에 걸쳐 하나하나 쌓는데도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특히 2300t짜리 대형 금속 장비를 해상 크레인으로 들어서 안쪽 공차가 불과 5㎜인 실린더 안에 넣는 작업을 무사히 끝내자 BP 감독관도 "삼성중공업의 기술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일반 상선을 건조할 때 선주들이 파견하는 감독관은 5~6명 정도이지만,현재 거제도 삼성중공업 FPSO 도크에는 200여명의 BP 감독관들이 막바지 안전 점검에 한창이다. 하문근 삼성중공업 조선해양연구소 상무는 "A급 태풍과 영하 13도,파고 16.3m의 악조건에서도 원유와 가스를 뽑아올릴 수 있는 해양 플랜트를 만들기 위해선 기술과 안전에 대한 검증이 필수"라며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악명이 높은 NORSOK(해양설비 운용에 관한 노르웨이 정부 규정)에 근거해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 11월에 예정대로 BP에 인도하게 되면 삼성중공업뿐만 아니라 한국 조선산업이 해양 플랜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업계 관계자는 "북해용 FPSO에서 쌓은 기술력은 최근 유망 시장으로 떠오른 북극용 선박 · 해양 플랜트 수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쇄빙 장치를 단 LNG 운반선과 북극용 FPSO 개발에 뛰어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거제=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