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복지국가라는 이념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 이념의 철학적 기반이 사회적 기본권(사회권 · social right)과 사회적 책임론,공동체주의,인간의 존엄 등이다. 공공정책의 실제를 보면 복지국가 이념은 성장과 안정을 비롯해 노동,의료,교육,산업,아동복지,노인복지,주택,금융 등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그랜드 디자인'이라는 것이 또렷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로 위태로워진 한국을 '복지혁명'을 통해 지속적 발전이 가능한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복지국가 이념이 과연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볼 때 매우 회의적이다. 그 철학적 근거를 보면 개인의 발전과 사회발전을 방해하는,그래서 인류학적으로 매우 의심스러운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책임론에 따라 개인의 실패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가 어떻게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권 논리도 이 같은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의 구호대상이 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니까 이를 떳떳한 일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말이 사회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권 논리에 따라 타인의 생산 활동에 의존해 사는 것을 당당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세계가 지속 가능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늘날 인류에게 척박한 원시사회를 극복해 자유와 번영의 열린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적 책임을 자기책임으로,의존심을 독립심으로,연대감을 사유재산의 규범체계로 교체한 결과라는 것을 좌파 지식인들은 망각하고 있다. 개인의 실패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그래서 정부의 관료주의에 의존해야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느끼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가 발전할 수 있는가.

보편적 복지 개념도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남김없이 복지 수혜자로 꾸밈으로써,'구호대상' 낙인을 방지하는 사회권 역할을 보강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없는 사람을 위해 출발한 복지개념은 '왜 부자도 복지수혜자가 되어야 하는가'란 질문에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복지서비스의 이용에 빈자나 중산층,부자가 배제되면 사회통합이 어려워진다는 사회통합론이다.

이것은 멋진 개념이지만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좌파는 또 다른 카드를 내민다. 이것이 일종의 공동체주의 논리이다. 모든 사람들은 노령,실업,건강,빈곤과 같은 위험에 똑같이 노출돼 있고 그래서 모두 한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좌파는 그런 논리는 위험 가능성과 복지서비스 수요가 동질적이고 단순한 사회에서나 적용 가능할 뿐,다양성과 복잡성이 지배하는 거대한 열린사회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 대신에 자유주의의 '선별적 복지'가 왜 중요한지를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또 구호대상 낙인의 문제 역시 구호대상자를 밝히지 않을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복지국가 이념은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이다. 그 실천은 정부의 몫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좌파는 그 같은 청사진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원천적인 '지식의 한계'때문이다. 그 결과 시장이 정부보다 현명하다는 평범한 진리도 좌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가 모든 걸 잘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은 그런 데서 연유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좌파 지식인들은 잘못된 이념에서 헤매지 말고 자유주의야말로 지속가능한 발전원리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민경국 강원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