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수비수들을 위한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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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진 않아도 든든한 버팀목
그들이 행복할때 사회도 건강해
그들이 행복할때 사회도 건강해
우리들의 월드컵은 해피엔드로 끝났다.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는 정쟁으로 얼룩져 있는 신문,방송,뉴스나 숨 막히는 생활전선에서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고 애국으로 하나 되고 싶은 열정적인 응원에 대한 화답이었다.
국외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한번도 16강에 들지 못한 우리 팀이 운만 따랐다면 4강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체력과 기술로 보여줌으로써 온 국민을 감동에 빠지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비수들을 조명하는 기사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이정수,조용형,이영표,차두리 등이 박지성,이청용,박주영과 더불어 독자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이 흐뭇하다. 적지 않은 골을 막지 못한 수비수들에게 국민들은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창과 방패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아르헨티나에 4 대 1로 졌을 때 "우리 축구 수준이 겨우 이정도야"라고 짜증을 내면서 TV를 꺼버렸던 시청자들도 나이지리아와의 조마조마한 경기 장면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극적인 2 대 2의 스코어로 경기가 끝났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해 했던가.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뉴스의 주인공은 공격수이다. 그러나 패배한 게임이나 전체 게임을 반성적으로 검토할 땐 주로 수비수 얘기를 많이 한다. 가령 아르헨티나에 대패했을 때 외신은 "한국은 홍명보와 같은 수비수가 없다"는 뉴스를 타전해 왔다. 또 2002년과 2010년을 비교할 때 3,4위전을 제외하면 2002년은 6경기 동안 3실점 했지만 2010년은 4경기 동안 8실점 했다는 분석을 내어놓는다.
물론 그 얘기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비수들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면이 적지 않다. 세트피스에도 참가할 수 없는 최후방 수비수는 골을 넣을 기회란 사실상 없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최후의 보루이다. 순간적인 동작 하나에 게임의 승패가 좌우된다. 이처럼 수비수는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도 조명 받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수비수들이 많이 있다. 가정에도 있고,관공서에도 있고,회사에도 있다.
박봉으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에게 봉급 적다는 내색 하지 않고 철마다 가족 보양식을 못해 먹여 늘 미안해하는 가정주부들이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남편이 재산 증식한다고 위험한 투자를 강행할 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강구해두는 아내는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새벽 일찍 학교에 출근해서 저녁 늦게까지 근무하다 마지막 소등을 확인하고 힘없이 돌아가는 교사나 학생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어느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부산스러운 권력 이동과 관계없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바로 추진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수많은 공무원이야말로 우리들의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기억하기도 싫은 삼풍백화점,그 백화점이 무너지기 전까지 사주의 지시에 따라 마지막 점포를 지키다 매몰사했던 어린 여사원들도 믿음직한 수비수였다.
수비수는 역할의 성격상 잘 드러나지 않는다. 수비수들은 대체로 자신의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불이익을 원망하지 않는다. 수비수들은 자신의 미래보다 소속한 팀의 미래를 더 생각한다. 그래서 뒤에 알게 되는 수비수들의 처신은 언제나 훈훈한 미담이 된다. 이제 수비수를 더 살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수비수들이 더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더 튼튼해져서 어떤 환난(患難)에도 쉽게 몰락하지 않는다.
2010년 우리들의 월드컵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들의 축구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수비수는 할 일이 많다. 어떤 공격에도 몸과 마음을 던져 실점을 막을 수 있는 수비를 위해서 우리 사회는 수비수들을 보호하고 격려하고 육성해가야 한다.
이우걸 <시조시인>
국외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한번도 16강에 들지 못한 우리 팀이 운만 따랐다면 4강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체력과 기술로 보여줌으로써 온 국민을 감동에 빠지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비수들을 조명하는 기사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이정수,조용형,이영표,차두리 등이 박지성,이청용,박주영과 더불어 독자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이 흐뭇하다. 적지 않은 골을 막지 못한 수비수들에게 국민들은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창과 방패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아르헨티나에 4 대 1로 졌을 때 "우리 축구 수준이 겨우 이정도야"라고 짜증을 내면서 TV를 꺼버렸던 시청자들도 나이지리아와의 조마조마한 경기 장면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극적인 2 대 2의 스코어로 경기가 끝났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해 했던가.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뉴스의 주인공은 공격수이다. 그러나 패배한 게임이나 전체 게임을 반성적으로 검토할 땐 주로 수비수 얘기를 많이 한다. 가령 아르헨티나에 대패했을 때 외신은 "한국은 홍명보와 같은 수비수가 없다"는 뉴스를 타전해 왔다. 또 2002년과 2010년을 비교할 때 3,4위전을 제외하면 2002년은 6경기 동안 3실점 했지만 2010년은 4경기 동안 8실점 했다는 분석을 내어놓는다.
물론 그 얘기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비수들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면이 적지 않다. 세트피스에도 참가할 수 없는 최후방 수비수는 골을 넣을 기회란 사실상 없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최후의 보루이다. 순간적인 동작 하나에 게임의 승패가 좌우된다. 이처럼 수비수는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도 조명 받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수비수들이 많이 있다. 가정에도 있고,관공서에도 있고,회사에도 있다.
박봉으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에게 봉급 적다는 내색 하지 않고 철마다 가족 보양식을 못해 먹여 늘 미안해하는 가정주부들이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남편이 재산 증식한다고 위험한 투자를 강행할 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강구해두는 아내는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새벽 일찍 학교에 출근해서 저녁 늦게까지 근무하다 마지막 소등을 확인하고 힘없이 돌아가는 교사나 학생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어느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부산스러운 권력 이동과 관계없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바로 추진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수많은 공무원이야말로 우리들의 믿음직한 수비수이다. 기억하기도 싫은 삼풍백화점,그 백화점이 무너지기 전까지 사주의 지시에 따라 마지막 점포를 지키다 매몰사했던 어린 여사원들도 믿음직한 수비수였다.
수비수는 역할의 성격상 잘 드러나지 않는다. 수비수들은 대체로 자신의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불이익을 원망하지 않는다. 수비수들은 자신의 미래보다 소속한 팀의 미래를 더 생각한다. 그래서 뒤에 알게 되는 수비수들의 처신은 언제나 훈훈한 미담이 된다. 이제 수비수를 더 살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수비수들이 더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더 튼튼해져서 어떤 환난(患難)에도 쉽게 몰락하지 않는다.
2010년 우리들의 월드컵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들의 축구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수비수는 할 일이 많다. 어떤 공격에도 몸과 마음을 던져 실점을 막을 수 있는 수비를 위해서 우리 사회는 수비수들을 보호하고 격려하고 육성해가야 한다.
이우걸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