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 기아자동차가 연례 행사처럼 파업홍역을 치르면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질주해온 '비밀'은 국내외 경영자들의 '탐구사례' 중 하나다. 매년 여름 파업을 되풀이하고 있는 점을 감안,생산 · 판매계획을 수립할 때 아예 파업일정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끼워넣어 대응해 온 것 아니냐는 추측이 그 중 하나다. 현대 · 기아차 노조원들은 경위야 어찌됐건 파업 전리품을 챙기고 여름 휴가를 즐긴 뒤 특근 수당까지 받아가며 파업 차질분을 메워왔다. 열악한 환경의 협력업체 근로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300여명의 기아차 노조원들이 지난 주말 서울 양재동 현대 · 기아자동차 사옥을 향해 폭죽을 쏘아대며 또 한 차례의 파업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서울에 올라온 조합원들은 양재동 사옥 인근에 텐트를 치고 1박2일 노숙을 하며 결의를 다졌다. 회사 측은 사옥 주변에 통근버스로 장벽을 쳤다.

타임오프(근로시간 면제)를 둘러싼 기아차 노사의 첨예한 대치는 경영계와 노동계의 대리전으로 주목받으며 결말을 향해 아슬아슬하게 나아가고 있다. 3만여명의 조합원을 둔 기아차 노조는 작년 말 노 · 사 · 정이 어렵게 합의한 타임오프제를 무력화하려는 금속노조의 선봉에 선 모양새다. 내년 초까지 단체 협약이 유효해 타임오프 태풍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현대차와는 달리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에서 이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단체협약 효력이 벌써 종료돼 당장 이달부터 전임자 임금 지급이 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기아차 사측은 개정 노동법대로 월급을 줘야 할 19명의 타임오프 대상자 명단을 요구했다가 답변이 없자 204명의 전임자 전원에 대해 무기한 무급 휴직 발령을 냈다. 전임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현장에도 복귀하지 않아서다. 사측은 임 · 단협에서 전임자 문제를 논의했다가는 합법적 파업의 빌미를 줄 수 있다며 노조 측에 별도의 특별교섭을 요청해놓았다. 1인당 월 평균 2만7000원 수준인 회비를 1만원쯤 올려 전임자 월급을 해결하라는 '고통 분담형' 처방전도 노조 측에 제시하고 있다.

기아차 노조는 지난달 25일 조합원 투표를 통해 파업을 결의해 놓고 쟁의 수순을 밟고 있다. 겉으로는 강경 투쟁을 외치고 있지만 속내와 셈법은 복잡하다는 게 경영계의 관전평이다. 무엇보다 지난 1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데 이어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형님격인 현대차를 따돌리는 뜻밖의 선전이 노조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중형차 K5를 주문했다가 물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소비자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나온다. 언제까지 소비자들이 참아줄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기아차 임직원들에겐 1990년대 중반 프라이드 · 봉고 신화에 힘입어 현대차를 한때 앞섰다가 노사분쟁으로 파국을 맞았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이런 판에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타임오프 '재논의론'은 기아차를 비롯한 대형 사업장 노조 지도부에 강공의 이유와 "버티면 될 것"이란 기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국회는 이번 주부터 잇달아 타임오프 관련 토론회를 열기로 해 뒤늦은 논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시행과정에서 문제점을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더라도 원칙이 다시 흔들릴 가능성은 적지 않다. 기아차뿐 아니라 GM대우 만도 두산인프라코어 델파이 등도 전임자 임금 협상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원칙을 지켜온 기업들이 타임오프 싸움에 외롭게 내몰렸다는 생각이 들게끔 논란이 되풀이된다면 모두의 불행이다.

유근석 산업부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