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잊지못할 그 순간] "12년 전 北신포 밝히던 불빛…끝내 완공못해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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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익 KOTRA 사장 '경수로사업단 시절'
1998년 나는 북한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이란 곳에서 일했다. 기획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 주도로 북한에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기 위해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한국 사무소격으로 원전건설의 실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그해 7월,경수로 사업 현장인 함경남도 신포에 출장갈 일이 있었다. 신포는 물장수로 유명한 북청 아래에 위치한 도시로 북한이 금호지구로 명명했던 곳이다. 우선 베이징에서 고려민항을 타고 평양까지 갔다. 고려민항은 이륙 전까지는 냉방이 되지 않았고 승무원이 나눠준 부채로 더위를 식혀야만 하는 비행기였다. 평양에서 함흥까지는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프로펠러 전세기를 바가지요금을 내고 이용했고,마지막 행선지였던 신포까지는 5~6시간을 차로 이동하는 코스였다.
준비된 차는 과거에 타이어가 닳아서 사고가 났다는 20년도 넘어 보이는 일본제 마이크로 버스였다. 평양 공항에서부터 따라붙은 안내원이자 감시원인 북한 사람을 대동하고 긴장 상태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북한의 모습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등하교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20~30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길을 신발을 두 손에 들고 깃발을 따라 줄을 서서 걷고 있었는데,신발이 닳을까봐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키도 작고,깡마른 북한 사람들은 우리를 외계인 보듯 신기해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는데,가끔 우리에게 주먹을 내밀며 적대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 유리창 대신 비닐창이 붙어 있는 건물들과 전력 부족으로 오후 7시만 되면 깜깜한 도시로 변하던 함흥시내의 암울한 모습,그리고 그곳에서 어슬렁거리는 형편없는 몰골의 불쌍한 북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서로 같은 수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본 북한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빛바랜 사진이 되어 내 기억 한 구석에 남아 있다.
그렇게 가도 가도 캄캄한 길에 갑자기 눈부시게 환한 불야성이 나오면 그곳이 바로 발전부지다. 물론 이는 우리 발전기가 내뿜는 빛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지만,나는 역사적인 사업 현장에 와 있음을 알았고 그 환한 빛이 북한 전역을 밝힐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했었다. 거기에는 우리 정부,건설회사,한전 등에서 직원들이 파견돼 있었고,북한에서도 각 기관이 다 나와 있었다. 많은 수의 남북한 근로자가 함께 일하는 현장은 여행 과정에서 내가 보았던 북한 다른 지역의 핏기 없는 모습과는 달리 활기로 가득했다.
건설기술 부장이었던 내가 맡은 일은 현장에서 사용될 기술의 안전과 품질을 검토하고,공사의 전반적인 진척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설이 아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원전 건설에 남북한 기술자들이 함께 투입되었다는 것은 남북 모두에 새로운 분야의 경험과 기술을 습득할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이것이 비록 신포라는 작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했지만 머지않아 북한의 다른 지역과 분야로 확산될 것을 기대했다.
그 후 북한이 핵을 재무장하면서 모든 약속은 깨지고,우리는 현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한 근로자가 만들어냈던 생기 넘치던 사업 현장이 지금은 북한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괴물같이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렇게 무산되고만 경수로 사업이 지금 해외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당시 우리 기술진과 근로자가 경수로 사업 현장에서 쌓았던 원전 건설 경험은 아부다비 원전 수주를 가능하게 했고,터키 원전까지 우리가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현장 주역들이 지금 세계의 원전 건설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북한을 방문했던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북한을 밝히고자 했던 우리의 원전 기술은 세계를 밝히고 있다. 경수로 사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는 이를 실패로 만들지 않았다.
그해 7월,경수로 사업 현장인 함경남도 신포에 출장갈 일이 있었다. 신포는 물장수로 유명한 북청 아래에 위치한 도시로 북한이 금호지구로 명명했던 곳이다. 우선 베이징에서 고려민항을 타고 평양까지 갔다. 고려민항은 이륙 전까지는 냉방이 되지 않았고 승무원이 나눠준 부채로 더위를 식혀야만 하는 비행기였다. 평양에서 함흥까지는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프로펠러 전세기를 바가지요금을 내고 이용했고,마지막 행선지였던 신포까지는 5~6시간을 차로 이동하는 코스였다.
준비된 차는 과거에 타이어가 닳아서 사고가 났다는 20년도 넘어 보이는 일본제 마이크로 버스였다. 평양 공항에서부터 따라붙은 안내원이자 감시원인 북한 사람을 대동하고 긴장 상태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북한의 모습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등하교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20~30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길을 신발을 두 손에 들고 깃발을 따라 줄을 서서 걷고 있었는데,신발이 닳을까봐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키도 작고,깡마른 북한 사람들은 우리를 외계인 보듯 신기해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는데,가끔 우리에게 주먹을 내밀며 적대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 유리창 대신 비닐창이 붙어 있는 건물들과 전력 부족으로 오후 7시만 되면 깜깜한 도시로 변하던 함흥시내의 암울한 모습,그리고 그곳에서 어슬렁거리는 형편없는 몰골의 불쌍한 북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서로 같은 수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본 북한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빛바랜 사진이 되어 내 기억 한 구석에 남아 있다.
그렇게 가도 가도 캄캄한 길에 갑자기 눈부시게 환한 불야성이 나오면 그곳이 바로 발전부지다. 물론 이는 우리 발전기가 내뿜는 빛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지만,나는 역사적인 사업 현장에 와 있음을 알았고 그 환한 빛이 북한 전역을 밝힐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했었다. 거기에는 우리 정부,건설회사,한전 등에서 직원들이 파견돼 있었고,북한에서도 각 기관이 다 나와 있었다. 많은 수의 남북한 근로자가 함께 일하는 현장은 여행 과정에서 내가 보았던 북한 다른 지역의 핏기 없는 모습과는 달리 활기로 가득했다.
건설기술 부장이었던 내가 맡은 일은 현장에서 사용될 기술의 안전과 품질을 검토하고,공사의 전반적인 진척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설이 아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원전 건설에 남북한 기술자들이 함께 투입되었다는 것은 남북 모두에 새로운 분야의 경험과 기술을 습득할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이것이 비록 신포라는 작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했지만 머지않아 북한의 다른 지역과 분야로 확산될 것을 기대했다.
그 후 북한이 핵을 재무장하면서 모든 약속은 깨지고,우리는 현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한 근로자가 만들어냈던 생기 넘치던 사업 현장이 지금은 북한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괴물같이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렇게 무산되고만 경수로 사업이 지금 해외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당시 우리 기술진과 근로자가 경수로 사업 현장에서 쌓았던 원전 건설 경험은 아부다비 원전 수주를 가능하게 했고,터키 원전까지 우리가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현장 주역들이 지금 세계의 원전 건설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북한을 방문했던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북한을 밝히고자 했던 우리의 원전 기술은 세계를 밝히고 있다. 경수로 사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는 이를 실패로 만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