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을 달군 남아공 월드컵은 '무적함대' 스페인이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컵을 안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월드컵은 이변과 화제가 많았다. 독일 오버하우젠 해양생물박물관의 한 문어는 독일이 치른 일곱 경기의 승패를 예측하고,스페인의 우승까지 예언해서 화제를 모았다. 축구 강국인 이탈리아,프랑스가 조 예선을 통과하지 못한 채 일찍이 퇴장한 것은 이변이었다. 우승후보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8강전에서 떨어지고,반면에 유럽 팀들은 약진했다.

아르헨티나를 이끈 메시의 폭발적인 드리블,우루과이의 포를란과 독일의 신예 뮐러의 아름다운 골,한국의 박주영과 일본의 혼다가 보여준 그림 같은 프리킥 등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더구나 태극전사들은 세계의 강호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처음으로 원정 16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다음 대회에서 더 큰 도약을 기약했다. 이젠 축구 중계를 보며 흥분과 설렘으로 밤을 새우던 일도 추억으로 돌아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8강전 경기를 최고의 경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빠르고,거칠고,정교한 독일에 매혹됐다. 독일은 중원을 장악하고,아르헨티나의 맹수들을 잠재웠다. 그들은 축구에는 성과 속의 분별이 없고,인종과 국가 사이의 차별이 없음을 보여주고,대신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상대 진영을 돌파하는 용맹성,눈물겨운 동지애,엄정한 자기 규율,팀을 위한 헌신과 희생,숭고한 승리에 대한 집념을 찬란하게 드러냈다.

《축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쓴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은 "놀라운 몸의 전환,엄청난 압박 속에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트래핑,상황을 우아하게 풀어내고 상대를 '늙어 보이게' 만드는 속임수"가 축구의 매력이라 했는데,이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드러난 독일 축구에 대한 묘사가 아닌가.

사람들은 왜 축구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축구에 따르는 수사학을 보면 축구는 총성 없는 전투이고,피 흘림이 없는 전쟁이다. 그라운드에서 맞붙은 양 팀 감독들은 상대방을 무너뜨릴 '전략'을 짜고,공격수들은 상대편의 취약점을 '공략'하며,수비수들은 상대 공격수들의 '집중포화'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전선'을 사수한다. 그러나 승과 패로 엇갈리는 이 스포츠를 대개의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라 '축제'로 즐긴다. 공을 쫓아 달리고,몸싸움을 하고,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는 이 과정에서 몸의 약동과 정신의 고양감을 함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독일이 다른 국가에 비해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순혈주의를 버리고 다국적 · 다인종 융합으로 팀을 꾸린 덕분은 아닐까. 글로벌 시대의 화두는 노마디즘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에 이미 5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거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발적 노마드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한다. 이민자,망명객,이주노동자라는 신분으로 정주민과 섞여 사는 노마드들을 포용해서 문화적 융합을 이룰 것인가,아니면 이들을 분리하고 내치는 순혈주의를 고집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어느 민족에나 하나의 과제다.

세대와 이념,지역과 인종적 차이를 녹여 융합하지 못하고 내치는 선택은 잠재적 자원과 영토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분열과 배제라는 뺄셈의 정치학을 추구한 민족은 쇠퇴하고,'융합적인 문명'을 이룬 민족들,즉 융합과 소통으로 덧셈의 정치학을 추구한 민족들은 살아남고 번성했다. 이번 남아공월드컵에는 어느덧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우리가 내면에 새겨야 할 소중한 교훈도 들어 있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