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 날카롭게 파헤친 '史史로운' 얘기죠"
"동양 최고의 역사서 《사기》는 탁월한 서사 전통을 간직한 실록이자 행간마다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며,문사철을 집대성한 백과전서이자 인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간학의 보고입니다. 번역하면서 새삼 느낀 것이지만,인간의 본질에 관심을 두고 인물의 삶에서 핵심적인 포인트를 잡아내 포지셔닝하는 힘은 사마천이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죠."

15년여에 걸친 《사기》 번역의 마무리를 앞둔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47)는 14일 이렇게 말했다. 《사기》는 상고 시대부터 한(漢) 무제까지 중국 고대사를 기록한 동양 고전의 정수.중국 '25사(史)'의 시초이자 《삼국지》와 함께 '25사'의 핵심으로 꼽히는 사서다.

김 교수는 1995년 《사기》 번역을 시작해 《사기 열전》 《사기 본기》를 출간한 데 이어 《사기 세가》(민음사 펴냄)를 내놓았다. 이로써 사기 130편 가운데 제왕들의 역사인 '본기' 12편,왕과 제후들을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사적을 기록한 '열전' 70편,봉건제후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세가' 30편 등 112편을 번역해 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이야기는 거의 다 소개한 셈이다. 《표》 10편의 번역도 끝냈고 《서》 8편도 오는 9월이면 번역을 마칠 예정이어서 《사기》 완역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미 번역된 책도 나와 있지만 저는 혼자서 일관성 있는 문체로 방대한 《사기》를 번역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직역을 원칙으로 삼아 2000년 전의 책을 오늘날의 언어로 복원하되 원전의 맛을 살리면서도 한글 독자를 위한 가독성도 고려하자니 어려운 작업이었죠."

김 교수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천도시비(天道是非),즉 하늘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사마천은 '백이열전'에서 밝혔듯이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하늘의 이치가 세상살이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 현실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세상의 지위나 명예에 구애받지 않고 이면에 가려져 있는 인품이나 덕을 중심으로 인간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엄청난 권력을 누렸던 한신,경포,팽월 등을 강등해 '열전'에 실은 반면 공자와 진섭을 높이 평가해 '세가'에 싣는 등 역사를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공자는 당시 사람들이 상갓집 개에 비유했을 정도로 수난을 겪었지만 사마천은 그를 '지극한 성인'이라며 제후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

진섭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진섭은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으로 진나라의 학정에 농민들과 함께 봉기해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섯 달 만에 목숨을 잃었다. 비록 짧은 치세에 그쳤지만 사마천은 "진나라가 덕을 잃자 진섭이 세상에 나타났으며 천하의 일은 진섭에서 비롯됐다"며 덕을 잃은 위정자에 대한 하극상은 정당함을 시사했다.

사마천은 또한 순탄하게 살았던 인물보다 힘든 과정을 겪은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 반고가 《한서》에서 혈통을 중시한 것과 달리 사마천은 혈통보다 스스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에 나온 '세가'는 제왕에게 밀린 이인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저마다의 비극을 안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구천을 발 아래에 두었지만 오자서의 간언을 무시해 결국 구천에 의해 멸망한 이야기('오태백 세가'와 '월왕 구천 세가'),자신의 나라에서 권력을 얻지 못하고 화를 입을 위험에 처하자 제나라로 도망쳐 나왔지만 제나라 백성의 민심을 얻어 결국 왕위에 오르고 강성한 나라를 이룬 진나라 귀족 전완의 이야기('전경중완 세가')도 그런 사례다.

"진시황 때의 이사(李斯)는 좋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적국인 진나라에 와서 진시황을 20년 이상 도우면서 개혁정치를 통해 진을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입니다. 그의 개혁의지와 시스템,성공에 대한 열망은 배울 만하죠.특히 '때에 임하면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及時勿怠 · 급시물태)'는 그의 말에서는 주저 없는 결단과 실천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

남성의 상징을 거세당하는 궁형을 감수하면서도 《사기》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마천을 김 교수는 주저 없이 "나의 멘토"라고 했다.

매일 오전 2시30분쯤 일어나 아침에만 4시간을 번역에 매달리고 수업과 연구,출 · 퇴근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번역에 바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친 힘도 사마천의 굴하지 않는 정신에서 배웠다고 했다.

김 교수가 그동안 번역한 《정사 삼국지》 《정관정요》 《한비자》 《당시》 《송시》 등의 동양고전은 누적 판매량 80만부에 육박하는 스테디셀러다. 그는 "번역은 할수록 어렵고 독자가 많을수록 부담도 크다"면서도 "앞으로도 주요 고전을 계속 번역하겠다"고 말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