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기 전 KB금융회장,박해춘 전 우리은행장,강정원 전 국민은행장.이들의 공통점은 현 정부 들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금융계 수장이라는 것이다. 한때 '이헌재 사단'으로 불렸던 사람이라는 점도 닮아 있다. 이들의 퇴진을 두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헌재 사단의 축출'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때문일까. 현 정부 들어 정치권 실세들이 금융권에 관여하는 정도가 강해졌다. 청와대 비서관이 은행장들을 불러 모았을 정도니 말이다. '관치(官治)금융'이 아닌 '정치(政治)금융'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금융계에서는 이른바 '영포게이트' 파문을 계기로 정치권이 금융계 인사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관행이 근절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관치의 추억

1993년 2월 서울신탁은행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전날 임원승진을 통보받은 사람은 탈락했다. 대신 엉뚱한 사람이 임원으로 선임됐다. 주총 당일 감독당국에서 전화 한 통화로 임원을 바꿨다는 게 정설이다.

두 달 후인 1993년 4월엔 김재기 외환은행장이 사임했다. 은행장으로 선임된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이듬해인 1994년 11월엔 윤순정 한일은행장이 돌연 사표를 제출했다. 두 사람 다 '일신상의 사유'를 내세웠지만 '외부의 주문'에 의한 것이라는 게 일반적 해석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관치금융의 전성기였다. 은행장이나 임원이 되려면 감독당국의 '내락'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정치금융의 개화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2008년 12월 7명의 부행장을 바꿨다. 2007년 12월 박해춘 우리은행장은 7명의 임원을 퇴진시켰다. 모두 같은 해 4월 임원이 된 사람들이었다. 전임자들인 황영기 · 이덕훈 우리은행장도 임원인사를 수시로 실시했다.

한 금융계 인사는 "신임 행장이 경영진을 새로 구축하는 과정이었겠지만 이른바 실세들을 업고 임원이 되려는 사람이 많다보니 자리 마련을 위해 임원을 바꿀 수밖에 없는 면도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권 실세들이 정부가 주인인 우리은행과 주인없는 국민은행 임원인사에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놓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영포게이트 진상조사특위'위원 10여명은 1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을 방문했다. 이들은 유선기 선진국민정책연구원 이사장,조재목 KB금융 사외이사 등이 국민은행으로부터 일정한 편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강정원 전 행장이 KB금융 회장이 되기위해 이들을 끌어 들였다는 주장도 편다. 다른 일부에서는 어윤대 KB금융회장 선임을 두고도 '밀약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권 실세들이 은행 인사에 개입하면서 '감놔라 배놔라'했다는 주장이다.

◆후계자 양성이 시급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은 내부에서 은행장을 배출한다. 임원 인사도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실시한다. 현 정부 들어 외부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국민은행이나 우리은행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정인철 전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소집했던 은행장회의에 두 은행의 은행장이 배제될 정도로 정치권에 조차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인정받고 있다. 틀이 잡힌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확실한 후계구도를 만들어 오고 있는 점이 요인으로 꼽힌다.

한 전직은행장은 "확실한 후계자가 부상해야만 외부입김이 개입할 여지가 적어진다"며 "어윤대 KB금융 회장을 비롯한 국내 금융회사 CEO들도 후계자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 실세나 감독당국이 후계자를 용인할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경제부 금융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