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한국을 사랑했기에…고종 침전에서 불침번 선 '벽안의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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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464쪽 | 1만8800원
한강변에 묻힌 박애주의자
1886년 선교사로 조선땅 밟아
외교 고문 맡아 독립운동 매진
한글학자·언론인…1인 다역
한강변에 묻힌 박애주의자
1886년 선교사로 조선땅 밟아
외교 고문 맡아 독립운동 매진
한글학자·언론인…1인 다역
1949년 7월29일 백발의 서양 노인이 미국 해군 군용선을 타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난 지 40년 만의 귀환이었다. 부두에 발을 디딘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한다"고 했던 그였으니 그 감회가 오죽했으랴.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여에 걸쳐 태평양을 건너온 노인은 한국에 돌아온 지 1주일 만인 8월5일 눈을 감았고,소원했던 대로 한강변 양화진에 고이 잠들었다. 그는 바로 1886년 제물포항에 청년 선교사로 처음 발을 디딘 호머 헐버트였다.
미국 버몬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헐버트 박사는 조선이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이후 그는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을 지내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밀사 활동을 지원하는 등 조선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는 헐버트 박사의 평전이다. 저자는 대학 시절 헐버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를 읽고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열정적 삶에 감화돼 수십 년간 헐버트를 연구해온 김동진 유리치투자자문 회장.저자는 30여년간 금융계에서 일하면서도 헐버트의 삶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라며 헐버트를 연구했고,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해 회장을 맡고 있다.
평전은 선교사,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학자,역사학자,언론인으로서 조선의 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박사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헐버트는 조선에 오자마자 교육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고 육영공원 교사,한성사범학교 교장,경기고 전신인 관립중학교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과서 체계를 정착시키는 등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1889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썼고,국민교육을 위해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했다.
헐버트는 또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1896년 4월7일 창간한 '독립신문'의 탄생과정에서 서재필을 크게 도왔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것은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 독립신문 창간호에 찍힌 금요일이 실제로는 화요일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냈다.
뿐만 아니다. 헐버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시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등과 함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고,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황제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도 일했다. 조선에서 추방된 뒤에도 재미 한국인들을 격려하고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한국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고종황제가 해외 은행에 맡겼다가 일본에 빼앗긴 거액의 내탕금에 관한 내용도 흥미를 자아낸다. 평전에 따르면 고종황제는 1903년 12월 서울에 있는 독일공사관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소재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에 51만마르크를 맡겼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 총 세입의 1.5%나 되는 큰 돈이었다.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현재 가치는 약 2조원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일제가 탈취해간 이 돈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동분서주했던 헐버트의 눈물겨운 노력을 평전에서 살려낸다. 덕화은행장이 써준 예치금 영수증,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실체적 증거도 책에 실려 있다.
내탕금의 예치과정,고종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위임한 경위,일본이 예치금을 탈취한 과정과 이를 되찾기 위한 헐버트의 분투,광복 후 한국 정부가 이 사실을 헐버트로부터 전해듣고 취한 행위 등이 생생하게 복원돼 있다. 헐버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이 이자까지 쳐서 이 돈을 꼭 받아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헐버트의 기일(8월5일)을 앞두고 나온 평전에서 저자는 "헐버트는 지덕체(智德體)를 갖춘 전인격의 표상이자 뜨거운 가슴을 가진 박애주의자 · 미래지향적인 실용주의자였다"며 "그를 교육학자,한글학자,역사학자,언론인,선교사,독립운동가 등 어떻게 불러도 좋지만 그의 정신과 사상은 우리 가슴 속에 항상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여에 걸쳐 태평양을 건너온 노인은 한국에 돌아온 지 1주일 만인 8월5일 눈을 감았고,소원했던 대로 한강변 양화진에 고이 잠들었다. 그는 바로 1886년 제물포항에 청년 선교사로 처음 발을 디딘 호머 헐버트였다.
미국 버몬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헐버트 박사는 조선이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이후 그는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을 지내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밀사 활동을 지원하는 등 조선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는 헐버트 박사의 평전이다. 저자는 대학 시절 헐버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를 읽고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열정적 삶에 감화돼 수십 년간 헐버트를 연구해온 김동진 유리치투자자문 회장.저자는 30여년간 금융계에서 일하면서도 헐버트의 삶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라며 헐버트를 연구했고,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해 회장을 맡고 있다.
평전은 선교사,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학자,역사학자,언론인으로서 조선의 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박사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헐버트는 조선에 오자마자 교육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고 육영공원 교사,한성사범학교 교장,경기고 전신인 관립중학교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과서 체계를 정착시키는 등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1889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썼고,국민교육을 위해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했다.
헐버트는 또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1896년 4월7일 창간한 '독립신문'의 탄생과정에서 서재필을 크게 도왔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것은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 독립신문 창간호에 찍힌 금요일이 실제로는 화요일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냈다.
뿐만 아니다. 헐버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시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등과 함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고,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황제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도 일했다. 조선에서 추방된 뒤에도 재미 한국인들을 격려하고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한국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고종황제가 해외 은행에 맡겼다가 일본에 빼앗긴 거액의 내탕금에 관한 내용도 흥미를 자아낸다. 평전에 따르면 고종황제는 1903년 12월 서울에 있는 독일공사관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소재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에 51만마르크를 맡겼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 총 세입의 1.5%나 되는 큰 돈이었다.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현재 가치는 약 2조원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일제가 탈취해간 이 돈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동분서주했던 헐버트의 눈물겨운 노력을 평전에서 살려낸다. 덕화은행장이 써준 예치금 영수증,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실체적 증거도 책에 실려 있다.
내탕금의 예치과정,고종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위임한 경위,일본이 예치금을 탈취한 과정과 이를 되찾기 위한 헐버트의 분투,광복 후 한국 정부가 이 사실을 헐버트로부터 전해듣고 취한 행위 등이 생생하게 복원돼 있다. 헐버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이 이자까지 쳐서 이 돈을 꼭 받아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헐버트의 기일(8월5일)을 앞두고 나온 평전에서 저자는 "헐버트는 지덕체(智德體)를 갖춘 전인격의 표상이자 뜨거운 가슴을 가진 박애주의자 · 미래지향적인 실용주의자였다"며 "그를 교육학자,한글학자,역사학자,언론인,선교사,독립운동가 등 어떻게 불러도 좋지만 그의 정신과 사상은 우리 가슴 속에 항상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