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의 침묵에 대해 "정중한 거절의 뜻으로 해석해 달라"고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만찬 전부터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수락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강조해왔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화법이었다.
반면 정 부회장은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염화시중은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로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는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의 의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동시에 회장직 수락에 대한 가능성이 아직 살아 있다는 기대감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재계 관계자는 "추대를 하는 전경련과 부담을 느끼는 삼성 측의 설명이 다소 엇갈리고 있다"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회장이 만장일치로 자신을 추대한 회장단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만찬 직후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대기업 회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이 회장이 내내 침묵을 지켰다는 정 부회장의 설명과 달리 "이 회장은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회장이 고사한 것으로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사는 아니었지만…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다시 "(이 회장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저 인사치레로 검토하겠다고 한건지,아니면 진짜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한건지 시간이 좀 더 지나봐야 알 것 같다"고 애매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자신이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기사에 실명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올림픽 유치 출장 15회 남았다"
이날 만찬에서 이준용 대림 회장이 가장 먼저 회장직 추대 제안을 했고 이후 모든 회장이 뒤따라 같은 제안을 했다. 이 회장은 "오늘 와 주셔서 고맙다. 경영활동을 하지 않았던 기간에 여러분들이 전경련을 이끌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말만 한 뒤 최대한 말을 아꼈다. 정 부회장은 추대 배경에 대해 "내년에 50주년을 맞는 전경련의 차기 회장은 4대 그룹에서 나와야 하고,고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이 초대 회장이었던 점 등을 감안해 이 회장이 맡아줬으면 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전 삼성 전략기획실장)이 참석한 총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율했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은 다만 참석 인사들에게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돕기 위해 올해에만 다섯 번,내년엔 열 번을 해외에 나가야 한다"는 계획을 공개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림픽 유치에 전념해야 할 상황에서 전경련 회장직을 맡기 어려운 여건임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차기 회장 인선 장기화할 듯
전경련 회장단은 이 회장이 즉답을 하지 않자 "아직 조석래 회장의 임기가 6~7개월 남아 있고 사표가 수리된 것도 아닌 만큼 전경련 회장 추대 문제는 조 회장의 치료 과정을 보면서 더 검토를 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이번 달이 가기 전에 마무리 지으려 했던 차기 회장 추대 작업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 회장과 함께 유력한 추대 후보로 거론되는 정몽구 현대 · 기아자동차 회장도 이미 고사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밝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날 만찬에는 이 회장을 비롯해 최태원 SK,이준용 대림,김승연 한화,조양호 한진,박용현 두산,박영주 이건산업,현재현 동양,강덕수 STX,정준양 포스코,이웅열 코오롱,최용권 삼환,류진 풍산,김윤 삼양사 회장과 신동빈 롯데 부회장,정병철 상근부회장 등 전경련 회장단 대부분이 참석했다.
송형석/장창민/김현예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