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부산 좌천동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회초리를 든 선생님이 학생의 번호를 부르면 호명된 학생은 자신의 수학 점수를 큰 소리로 외친다. "51번" "92점" "52번" "76점" "53번" "88점".

자신의 번호가 다가오자 까까머리 한 학생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62번" "5점요. " "뭐라고?" 선생님은 점수 앞자리 수를 빼먹고 답한 걸로 오해한 것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려오는 똑같은 답변."5점요. "

학생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화가 난 선생님은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부터 이 소년의 별명은 '김오'가 됐다. 하지만 그는 2년 뒤 이 학교에서 3명만 들어간 부산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하고 부산상고를 거쳐,부산대 재학 시절 일찌감치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1981년 36세에 증권사 임원에 올라 올해로 29년째 임원 생활을 하고,3개 회사에서 사장만 13년째다. 스스로를 '영원한 증권맨'이라고 말하는 김지완 하나대투증권 사장(64)의 얘기다.

◆취업이 목표였던 학창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해도 김 사장네는 경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5학년 때 부산으로 '쫓겨나듯' 이사한 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전학 가서 첫 번째 시험이었는데 부산은 수업 진도도 경주보다 빠르고 문제도 차원이 달랐던 것 같아요. " 김 사장은 '김오'란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을 설명하면서 쑥스러워 했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7남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어머니를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지역 최고 명문 부산중에서도 늘 전교 상위권이었지만 가정 형편상 부산상고로 진학했다. 전교 60등까지 주어지는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 등이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하면서 2학년이 되자 취업반에 들어갔다. 그의 꿈은 '은행원'이었다. 빨리 직장을 잡아 집안에 보탬이 되고 동생들 뒷바라지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업 전 치른 은행 입행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한다. "그냥 그렇게 상고를 나와 은행에 갔더라면 아마 지점장 정도 하고 직장 생활을 마쳤을 겁니다. 시험에 떨어진 게 오히려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셈이죠."

어쩔 수 없이 작은 개인회사에 취직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저녁에는 사장 아이들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고교 동창들보다 2년 늦은 1966년 부산대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그때 만난 대학 친구 12명과 바위처럼 변함없는 우정을 기리자며 '우암회(友巖會)'를 만들었다.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김정복 전 보훈처 장관 등이 우암회 친구들이다.

◆증권맨의 길로

김 사장이 대학 재학 중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들어간 곳이 한일합섬이었다. 한일합섬은 사실상 첫 직장이었고,그는 회사가 정말 좋았다. 월급은 재계 최고 수준이었고 한 달이 멀다하고 나오는 상여금도 두둑했다. 무엇보다 1973년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하며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1973년 한일합섬의 기업공개(IPO)는 그를 증권맨의 길로 이끌었다. 김 사장은 상장 후 관리를 위해 한일합섬 주식부에서 근무했다. 이듬해 한일합섬이 부국증권을 인수하자 자원해서 인수단에 들어갔다. "증권은 우리 금융시장의 꽃이 될 겁니다. 저를 부국증권으로 보내주십시오." 담당 상무는 그를 만류했지만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승낙을 받았다.

그 이후는 탄탄대로였다. 1975년 대리로 승진해 계열사로 옮기면서 바로 과장이 된 그는 이듬해 8월 다시 부장으로 승진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좋아했던 일이기에 밤낮 가리지 않고 뛰었다. 시장도 도왔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을 기반으로 주식시장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기획부장,영업부장을 거쳐 영업이사에 올랐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신의 영역이 아닌 이상,사람으로서 할 수 있다면 고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했습니다. 이는 영업성과로 이어졌습니다. "

◆임원만 30년

김 사장은 올해로 증권사 임원 생활만 만 29년째다. 그의 직장 생활에도 한 차례 위기가 있었다. 1998년 외환위기 때다. 한일합섬그룹이 부도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룹의 18개 계열사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부국증권이었다. "증권사들이 지급보증을 통해 계열사에 자금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해주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보증한도를 제한한 감독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대주주를 설득해 부국증권은 살 수 있었습니다. "

부국증권은 오늘의 김 사장을 만들어준 곳이다. 그래서 부국증권 사장에서 물러나면서 갖고 있던 회사 주식 2000주를 OB모임에 기증했다.

2003년 때마침 현대그룹에서 현대증권 사장으로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한 회사에서 사장은 두 번(연임)이면 된다고 생각해 일찌감치 사의를 표명한 상태였다. 현대증권에서도 연임을 했다. "주위를 보면 누구든 '3선'이 문제더라고요. 사람은 들 때와 날 때를 알아야 합니다. "

그가 현대증권 사장으로 일한 4년6개월간 자기자본은 1조2000억원에서 2조4000억원으로 두 배로 성장했다. 그는 이를 부하 직원들의 공으로 돌렸다. "가보니 정말 좋은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기를 세워주고 영업을 잘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줬을 뿐입니다. "

2008년에는 하나금융지주 계열의 하나대투증권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나대투증권은 김 사장 취임 후 자산관리회사의 꺼풀을 벗어던지고 종합 증권사로 도약하게 된다. 지난해 자기자본이익률(ROE)과 1인당 생산성에서 각각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순이익은 2520억원으로 대우증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올해는 자산관리직,증권직,지원직으로 혼재된 사내 직군을 통합할 계획입니다. 직군 통합은 하나대투증권을 '톱 클래스' 증권사로 이끄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

◆"노력하면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의 좌우명이다. "임직원들한테 늘 얘기합니다. '그까짓 거 하니까 다 되더라. 5번 해서 안 되면 10번 하고,10번 해서 안 되면 20번 하면 된다'고."

그는 건강 전도사이기도 하다. 건강한 체력에서 열정도 솟고 영업성과도 뒤따른다는 것이 지론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 6시에 임원,본사 부서장들과 함께 여의도공원을 두 바퀴 뛴다. 총 5.1㎞로 30분간 내내 시속 10㎞ 정도로 달려야 한다. 처음에는 힘들어 하던 부서장들이 이제는 가뿐히 뛸 정도가 됐다고 한다.

현대증권 시절부터 임직원들과 매년 해온 '불수도북'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불수도북'은 서울 북쪽의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등 4개 산,40여㎞를 무박2일로 종주하는 것이다. 지난 9~10일 열린 올 '불수도북' 산행에는 고객들까지 동참했다.

'나는 걷는다'.퇴임 후 김 사장의 계획도 그렇다. "어린 시절 즐겨 외웠던 시조가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입니다. 그 태산을 꼭 등반하고 싶습니다. 40일간 800㎞ 코스를 걷는 스페인 산티아고도 가보고 싶어요. 뒷날 여유를 즐기기 위해 지금은 열심히 살아야죠.하나금융그룹 위상에 걸맞은 최고 증권사로 만들어놓는 게 당면 목표입니다. "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