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英 생산증가 연평균 0.5% 안돼…혁명 부정하는 주장 봇물
사상 최초로 인구·생산 동시 증가했다는 점에 의미 부여해야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어야 하며 얼마나 큰 변화여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아직 없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부정하는 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우선 산업혁명기(1760~1830년)의 '느린' 성장률에 주목한다. 니컬러스 크래프츠에 따르면 이 시기 영국의 1인당 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0.5%를 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이 맞는다면 영국의 1인당 생산은 산업혁명기가 아니라 그 이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183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는 매년 1% 이상의 성장을 기록했으며,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성장률은 2%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가운데 순자본의 형성비율이 1688년 5%,1780년 6%,1800년 7% 정도의 느린 속도로 진행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6세기 영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작은 농촌 마을에 살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곡식을 키우고 양을 기르는 정도였다. 그들의 운명은 대체로 자연에 의해 결정됐다. 적당한 햇볕과 빗물이 조화를 이룬 여름 날씨는 풍요로운 가을을 예약했으며 반대의 경우에는 재앙을 몰고 오는 예고편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해가 뜨면 일어났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마 농촌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8세기 초부터 시작된 가내 수공업 때문이었다.
농촌 사람들은 겨우내 할 일이 없었다. 이들의 유휴노동력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는 도시의 의류상인들이 있었다. 상인들이 양털을 구입해 나누어주는 것으로 동절기 가족사업은 시작됐다. 양털을 세탁해 먼지와 기름기를 제거한 후 염색하고 털의 끝이 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손질하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런 다음 물레를 이용해 실을 만들었다. 이 작업은 대개 미혼 여성이 담당했는데 이 때문에 실 잣는 사람(spinster)이라는 영어 단어가 아직도 미혼여성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유래가 됐다. 베틀을 이용해 옷감을 짜는 작업은 힘든 노동을 요했기에 남자들이 맡았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이러한 광경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재료의 값이 싸고 제조 과정이 간단한 면(綿)이 양털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농촌 사람들은 비록 재료와 장소는 달랐지만 다시금 옷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됐다. 인클로저와 상업적 농업의 확산으로 수많은 영세농들이 도시로 쫓겨 갔는데 그곳에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기다리는 면직공장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을 뽑고 이를 천으로 만드는 작업의 내용은 같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작업환경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방적과 직조의 대부분 공정이 기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람은 보조적 기능에 불과했다.
거기에다 기술과 생산성 향상은 눈부신 것이었다. 예컨대 18세기 인도의 면 방적기는 면화 45㎏을 면사로 가공하는 데 5만시간의 노동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1779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만든 뮬 방적기를 이용하면 불과 2000시간이면 같은 양의 면사를 가공할 수 있었다. 여기에 증기기관의 동력을 연결시키면 300시간이면 충분했다. 무려 160배가 넘는 생산성의 향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의 대세로서 영국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후 시차를 두고 유럽으로 미국으로 마침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800년 9억명에 머물렀던 세계 인구는 지금 68억명을 넘었다. 오랜 인류역사에 비추어보면 이는 수직에 가까운 것이며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 기간의 성장률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구와 1인당 생산이 동시에 증가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연 10%를 넘나드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두고 이를 혁명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