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이씨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순간 빚더미에
처자식은 친정집으로..본인은 친구집 전전하는 신세
카드사→저축은행→대부업체 順으로 '빚의 도미노'
미소금융 지원 한계.."서민 금융기관 금리인하해야"



지난 22일 서울 명동에 위치한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부.

어깨가 축 처진 10여명의 가장들이 채무조정 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을린 낯빛의 건장한 체격인 이철영(40)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이씨는 "10년 가까이 운영해온 꽃집이 열흘 전 문을 닫았다"면서 "임대료 등 영업비용을 대느라 그동안 집도 날렸고 남은 것은 카드빚과 사채빚 1억8천만원 뿐"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에 사업이 어렵게 되자 부모님 도움으로 마련한 서울 성북구 85㎡ 아파트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업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작년 초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갔다.

담보도 없고 신용등급도 낮아진 이씨는 30%대의 고금리를 물며 캐피탈에서 영업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강남에서 강북으로 가게를 옮겼지만 살인적인 이자를 갚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면서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고 사채까지 끌어다 썼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살 집도, 그렇다고 이렇다 할 소득도 없어지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는 처지에 놓였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와 아내는 지방의 친정집에서 당분간 지낼 예정이며, 그는 친구집을 전전하며 배달 일이라도 알아볼 작정이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 아파트도 있고 가게도 꽤 괜찮았는데 삐끗하다 싶더니 어느 순간 무너져버렸다"고 고개를 떨궜다.

경기회복을 보여주는 각종 경제지표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지만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다.

명동지부에만 하루 50여명이 채무 조정 상담을 받고 그 중 절반가량인 20여명이 개인 워크아웃을 신청한다.

올해 6월까지 신용회복위원회 23개 지부에 워크아웃을 신청한 이들은 총 4만1천21명에 이른다.

◇ 서민 옥죄는 캐피탈 등 제2금융권 고금리

서민들은 실직이나 사업부진 등으로 생활난에 몰리면 우선 시중은행에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

그래서 사정이 나아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20%대 금리의 카드론이나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살인적인 이자에 시달리게 된다.

저축은행 금리는 신용등급이 우수하면 10% 안팎이지만 신용 6∼10등급의 금리는 30%를 웃돈다.

그럼에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시중은행 문턱은 더욱 높아진 탓에 서민들은 고리대금과 다를 바 없는 높은 이자를 감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제2금융권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제2금융권의 가계대출 규모는 올해 1분기 말 현재 143조9천793억원으로, 2007년 1분기 말의 97조9천195억원에 비해 47%나 급증했다.

같은 기간 예금 취급기관 전체 가계대출 규모는 24.1% 증가했다.

자연스레 제2금융권 가계대출이 예금취급기관 전체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7년 1분기 22%에서 올해 1분기 말에는 26%로 크게 늘었다.

한국은행 금융통계팀 이재기 과장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중은행들이 담보형태의 주택대출에만 집중하고 신용대출은 잘 안해주면서 서민들이 제2금융권을 많이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제2금융권에서 연체 등으로 대출이 여의치 않으면 이제는 금리가 40%를 넘나드는 캐피탈을 찾게 된다.

사채시장을 양성화한 대부업체들의 평균 대출금리가 40% 초반대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사채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감당못할 이자가 또 다른 빚을 부르는 '빚의 도미노'에 내몰리는 것이다.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부의 강윤선 지부장은 "여기 찾아오는 이들 대부분이 카드 → 저축은행 → 대부업체 등의 순서로 빚을 졌다.

고금리와 일시 상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도움을 청한다"고 말했다.

◇ 저신용자 1천만명 넘어..무기력한 정부 지원제

정부도 서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여러 방안을 내놓고 있다.

서민들의 창업자금 마련을 위한 미소금융에 이어 신용등급 6등급 이하 저소득층 등을 대상으로 10% 초반 금리로 1천만∼2천만원의 소액대출을 해주는 햇살론이 26일 출시됐다.

하지만 이런 서민들을 위한 금융제도들은 아직은 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1월부터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된 미소금융은 6월 말까지 1천372명에 109억원을 지원하는데 그쳤다.

최명순(가명.55) 씨는 조그만 점포라도 하기 위해 한 미소금융 지점을 찾았지만 거절당했다.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 워크아웃 프로그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씨는 "어려운 사람을 위한 대출제도라고 해서 찾아가 봤는데 뭐가 이리 조건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신용회복위원회 신중호 홍보팀장은 "워크아웃 프로그램을 2년간 수행한 뒤에야 미소금융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시행 초기보다는 다소 완화됐지만 자기자본비율 요건(30%) 영업기간(1년 이상) 등의 조건들도 서민들이 미소금융을 이용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금융위원회 신진창 서민금융팀장은 "지난 5월 대출 문턱을 낮춘 이후 월 10억원대였던 실적이 30억원 안팎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상담받은 사람중 대출 적격자 비율도 40%대로 10%포인트 이상 올라갔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민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의 서민 금융정책이 아무리 원활하게 이뤄지더라도 1천만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진 저신용자들의 대출 수요를 감당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제2금융권과 캐피탈, 대부업체 등 어려운 사정의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업체들의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정진 기자 transi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