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만 넘으면 술과 여자가 있다. 나폴레옹군(軍)은 이 말 한마디에 알프스를 넘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 교장선생님이 고3 학생들에게 했다는 얘기다. 남녀공학이니 절반은 여학생이었다. '남자는 의리다'란 급훈도 있었다. 담임은 기성세대의 낡은 사고를 부수고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전교조 소속 남자교사였다.

국회의원,군수,초등학교 교장 등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막말과 성희롱 발언 논란이 끝간 데 없이 이어지고 있다. 보도된 내용은 차마 옮기기 민망한 것들이다. 계약직 여직원을 두고 군수가 누드사진을 찍자며 "엉덩이가 볼록하고 라인이 예뻐 잘 나오겠다"고 말하고,교장이 교사에게 "처녀 맞느냐"고 했다는 마당이다.

논란의 정점엔 현직 국회의원이 있다. 본인은 강력 부인했지만 현장에 있던 참석자들이 분명 그런 발언이 있었다고 밝힌 상황이다. 사실이라면 그에겐 정말 겁나는 게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많은 사람과 집단,아니 우리 사회 전체를 한꺼번에 깎아내리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정 직업을 비하하고,불특정다수 대학을 폄하했다. 남성 전체를 여자 외모만 밝히는 속물로 매도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욕보였다. 그가 했다는 말들은 우리 사회에 불신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을 뭉뚱그려 보여준다. 남성 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와 외모 및 학벌 제일주의 등.

그런데도 '말 한마디 잘못 했다 곤욕을 치른다''자리를 안 가린 게 죄지 남자들끼리야 할 수 있는 얘기다''남자 치고 돌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는 말이 나온다. 왜 아니랴.한국에서 여자로 살다 보면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당한다. 회식 자리만 해도 툭하면 분위기용 유머라며 듣기 민망한 발언이 쏟아진다.

불쾌해 하면 말도 마음대로 못하겠다며 몰아세우고 얼굴을 붉히면 '그깟 일에' 식으로 한 술 더 뜬다. 결국 많은 여성들이 괜찮은 척 받아넘기거나 모른 체한다. 윗사람은 물론 동료나 아랫사람의 말이라도 문제삼아 봤자 득 될 것 없다 싶어 애써 눈감고 지나가는 일도 흔하다.

게다가 그들 상당수는 자기 언행이 상대에겐 쓰라린 상처가 되는 '차별'이란 인식조차 없다. 문제의 국회의원이 소속당 대표를 지낸 선배 의원에 대해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한 몸매에 애도 없는 처녀' 운운하고,신입사원 면접장에서 '고추잠자리는 빤쓰'라고 말한 걸 블로그에 올렸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뿐이랴."여자도 하는데요" "여자가"라는 말 또한 너무 당연하게 나온다. 더 심각한 건 이 같은 차별적 인식이 지도층 인사에게서 더 자주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판사가 나이든 여성을 향해 "이혼한 게 무슨 말을 하느냐"며 핀잔을 줬다거나 성희롱으로 고발됐던 군의원이 사과는커녕 "막말로 자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고 대응했다는 식이다.

성 차별이나 희롱이 무심코 이뤄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밥줄을 쥐고 있으니 대들지 못할 것이라거나 상대보다 자신의 말이 더 먹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애 상담을 원하는 남학생에게 '여자는 차값,남자는 집값'이라고 조언했다는 그 의원은 부럽기만 한 스펙의 소유자이자 의지의 한국인이다. 참석자들은 남 보란 듯 성공한 그에게 길을 묻고 희망과 용기를 얻으려 했지 솔직하다는 미명 아래 편법과 여성에 대한 품평이나 듣자고 모이진 않았을 것이다.

말은 생각과 가치관,인간됨됨이의 산물이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자나깨나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한 같은 사건은 언제고 재발할 수 있다. 차별적 언어는 그것이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것이든,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든,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하는 것이든 치사하고 악랄한 폭력이다. 성희롱 교육 강화 정도가 아니라 차별적 언행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제재가 가해져야 하는 이유다.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