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 기행] (12) 프랑스 아비뇽‥백작부인을 사랑한 젊은 시인…아비뇽에 戀詩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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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 하늘 펼쳐진 시계탑광장…야외카페서 엿보는 세속적 삶
700년전 페트라르카의 열정…해마다 연극축제 무대서 재탄생
700년전 페트라르카의 열정…해마다 연극축제 무대서 재탄생
젊은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오랫동안 한 여인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3년 전 이곳 아비뇽의 생 클래르 성당 부활절 미사에서였다. 하얀색 미사보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그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홍조 띤 얼굴에 온화한 빛을 담은 눈동자,적당히 날이 선 코,자그마한 입.그것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과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그녀가 일어서자 페트라르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밟고 있었다.
그의 지루한 가슴앓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기다리는 1주일은 10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그는 미사가 시작되기 전 교회 앞마당에서 기다리다가 그녀가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 그녀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미사가 끝나면 다시 그녀의 뒤를 밟았다. 여인은 늘 광장에서 마차에 올랐고 마부의 채찍소리를 뒤로 한 채 마차가 일으키는 희뿌연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보내고 난 일요일 오후 마음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오후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여인의 환영에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쏟아냈다.
그 사이 여인도 낯선 사내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페트라르카는 이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열정을 더 이상 다독거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어느 일요일 오후 그는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의 떨리는 작은 입을 통해 돌아온 한마디는 그를 좌절의 나락으로 몰고 갔다. 그녀는 '품절녀'였던 것이다. 위그 드 사드 백작의 부인으로 이름은 라우라(프랑스어로 로르)였다.
비탄이 그의 육신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는 오랜 번민 끝에 여인을 자신의 마음에서 지우기로 결심했지만 그 자리에 그녀의 얼굴은 더 선명하게 똬리를 틀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짝사랑은 베르테르(독일 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처럼 파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연시로 승화시켰다. 문학 속의 베르테르가 열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죽음을 택한 반면 현실의 페트라르카는 그 쓰디쓴 사랑의 고통을 문학으로 꽃피운 것이다.
스물세살에 시작된 이 고통스러운 짝사랑은 평생 지속될 숨가쁜 격정의 짧디짧은 서곡에 불과했다. 3년 동안 라우라를 바라보기만 하던 페트라르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비뇽을 떠난다. 겉보기에는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수여한 롱베의 성당 참사회원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잊어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라우라로부터의 탈출은 되레 그녀가 페트라르카의 마음 속에 얼마나 큰 존재로 자리잡고 있는가를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롱베에서의 7년간 그는 한시도 그녀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고통의 순간은 모두가 주옥 같은 연시로 초극됐다. 가장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는 시는 라틴어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여져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어는 페트라르카의 짝사랑을 통해 여물어 근대적인 문학어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인간의 진솔한 감정을 생생한 모국어로 표현한 이 선구적 작업은 곧 인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337년 아비뇽으로 돌아온 페트라르카는 자신이 라우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예 자신의 거처를 라우라의 집 근처인 보클뤼즈로 옮긴다.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도,그녀의 얼굴을 볼 수도 없지만 단지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숨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게는 크나큰 위안이었던 것이다.
10년 후 라우라는 38세로 때 이른 죽음을 맞는다. 20년간 자신의 온 마음을 지배해 온 그 아름다운 여인이 일순간에 저 세상 사람이 됐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통 속에서 페트라르카가 깨달은 것은 현세의 덧없음이었다. 그에겐 또 다른 초극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라우라의 현세적 아름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만큼 그녀의 아름다움을 영원의 사슬에 고정시킬 차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라우라는 페트라르카의 후기 문학 속에 영원한 미의 이상으로 자리잡는다.
페트라르카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짝사랑의 무대가 된 남프랑스의 소도시 아비뇽은 14세기 100여년간 교황청이 자리한 곳으로 유명하다. 13세기 말 세속 권력이 신장함에 따라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종교인들에게까지 세금을 매기려했는데 이에 반발한 교황과 힘겨루기를 한 끝에 교황권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그는 이를 계기로 새로 선출된 프랑스인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압박하여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교황은 남프랑스의 아를에 새 정청을 열었고 이때부터 7명의 교황이 70여년간 이곳에서 영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여행자에게 아비뇽은 견고한 성채처럼 비쳐진다. 이 점은 교황청 건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높이 50m,두께 4m에 달하는 거대한 석벽에 둘러싸인 교황청 건물은 성스러운 신의 전당이라기보다 견고한 성채와 같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위압적인 외관은 세속 정치권력의 위협을 받던 교권 열세기에 교황청의 자기보호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교황청으로 가려면 테제베 역에서 남북으로 뚫린 직선로인 레퓌블리크 거리를 따라가면 된다. 이 거리의 끝에 시계탑광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시청사와 오페라극장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비뇽의 세속적 삶을 살피려면 이곳의 야외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으리라.프로방스의 쪽빛 하늘과 쏟아지는 햇빛은 아비뇽 여행이 가져다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지금 아비뇽은 연극축제의 막바지 열기를 불사르고 있다. 해마다 7월이면 레퓌블리크 거리를 중심으로 전 시가지에 야외무대가 설치되고 세계 각국에서 모인 극단들이 저마다 최고의 작품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 속엔 정치적 혹은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역시 사랑이나 슬픔과 같은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정서를 진솔하게 쏟아내는 작품들이다. 관객은 연기자의 언어와 몸짓에 몰입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라우라와의 고통스러운 사랑 속에서 탄생한 페트라르카의 연시가 14세기 대중의 감동을 자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 풍성한 수확을 예고하는 씨앗은 7세기 전 페트라르카에 의해 아비뇽에 뿌려졌다. 이 점에서 무대의 연기자나 무대 아래 관객이나 하나같이 페트라르카의 아이들인 셈이다.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그의 지루한 가슴앓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기다리는 1주일은 10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그는 미사가 시작되기 전 교회 앞마당에서 기다리다가 그녀가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 그녀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미사가 끝나면 다시 그녀의 뒤를 밟았다. 여인은 늘 광장에서 마차에 올랐고 마부의 채찍소리를 뒤로 한 채 마차가 일으키는 희뿌연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보내고 난 일요일 오후 마음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오후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여인의 환영에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쏟아냈다.
그 사이 여인도 낯선 사내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페트라르카는 이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열정을 더 이상 다독거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어느 일요일 오후 그는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의 떨리는 작은 입을 통해 돌아온 한마디는 그를 좌절의 나락으로 몰고 갔다. 그녀는 '품절녀'였던 것이다. 위그 드 사드 백작의 부인으로 이름은 라우라(프랑스어로 로르)였다.
비탄이 그의 육신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는 오랜 번민 끝에 여인을 자신의 마음에서 지우기로 결심했지만 그 자리에 그녀의 얼굴은 더 선명하게 똬리를 틀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짝사랑은 베르테르(독일 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처럼 파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연시로 승화시켰다. 문학 속의 베르테르가 열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죽음을 택한 반면 현실의 페트라르카는 그 쓰디쓴 사랑의 고통을 문학으로 꽃피운 것이다.
스물세살에 시작된 이 고통스러운 짝사랑은 평생 지속될 숨가쁜 격정의 짧디짧은 서곡에 불과했다. 3년 동안 라우라를 바라보기만 하던 페트라르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비뇽을 떠난다. 겉보기에는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수여한 롱베의 성당 참사회원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잊어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라우라로부터의 탈출은 되레 그녀가 페트라르카의 마음 속에 얼마나 큰 존재로 자리잡고 있는가를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롱베에서의 7년간 그는 한시도 그녀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고통의 순간은 모두가 주옥 같은 연시로 초극됐다. 가장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는 시는 라틴어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여져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어는 페트라르카의 짝사랑을 통해 여물어 근대적인 문학어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인간의 진솔한 감정을 생생한 모국어로 표현한 이 선구적 작업은 곧 인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337년 아비뇽으로 돌아온 페트라르카는 자신이 라우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예 자신의 거처를 라우라의 집 근처인 보클뤼즈로 옮긴다.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도,그녀의 얼굴을 볼 수도 없지만 단지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숨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게는 크나큰 위안이었던 것이다.
10년 후 라우라는 38세로 때 이른 죽음을 맞는다. 20년간 자신의 온 마음을 지배해 온 그 아름다운 여인이 일순간에 저 세상 사람이 됐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통 속에서 페트라르카가 깨달은 것은 현세의 덧없음이었다. 그에겐 또 다른 초극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라우라의 현세적 아름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만큼 그녀의 아름다움을 영원의 사슬에 고정시킬 차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라우라는 페트라르카의 후기 문학 속에 영원한 미의 이상으로 자리잡는다.
페트라르카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짝사랑의 무대가 된 남프랑스의 소도시 아비뇽은 14세기 100여년간 교황청이 자리한 곳으로 유명하다. 13세기 말 세속 권력이 신장함에 따라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종교인들에게까지 세금을 매기려했는데 이에 반발한 교황과 힘겨루기를 한 끝에 교황권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그는 이를 계기로 새로 선출된 프랑스인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압박하여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교황은 남프랑스의 아를에 새 정청을 열었고 이때부터 7명의 교황이 70여년간 이곳에서 영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여행자에게 아비뇽은 견고한 성채처럼 비쳐진다. 이 점은 교황청 건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높이 50m,두께 4m에 달하는 거대한 석벽에 둘러싸인 교황청 건물은 성스러운 신의 전당이라기보다 견고한 성채와 같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위압적인 외관은 세속 정치권력의 위협을 받던 교권 열세기에 교황청의 자기보호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교황청으로 가려면 테제베 역에서 남북으로 뚫린 직선로인 레퓌블리크 거리를 따라가면 된다. 이 거리의 끝에 시계탑광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시청사와 오페라극장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비뇽의 세속적 삶을 살피려면 이곳의 야외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으리라.프로방스의 쪽빛 하늘과 쏟아지는 햇빛은 아비뇽 여행이 가져다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지금 아비뇽은 연극축제의 막바지 열기를 불사르고 있다. 해마다 7월이면 레퓌블리크 거리를 중심으로 전 시가지에 야외무대가 설치되고 세계 각국에서 모인 극단들이 저마다 최고의 작품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 속엔 정치적 혹은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역시 사랑이나 슬픔과 같은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정서를 진솔하게 쏟아내는 작품들이다. 관객은 연기자의 언어와 몸짓에 몰입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라우라와의 고통스러운 사랑 속에서 탄생한 페트라르카의 연시가 14세기 대중의 감동을 자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 풍성한 수확을 예고하는 씨앗은 7세기 전 페트라르카에 의해 아비뇽에 뿌려졌다. 이 점에서 무대의 연기자나 무대 아래 관객이나 하나같이 페트라르카의 아이들인 셈이다.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