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12) 英 산업혁명에서 맏아들은 엑스트라였다
중국 명나라 때 정화(鄭和)가 함선 300척에 3만명의 병력을 싣고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호르무즈 해협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하면서 조공외교를 펼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개빈 멘지스라는 영국의 퇴역 해군장교가 최근 출판한 책을 보면 정화 함대의 활약 범위가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그에 따르면 정화는 아메리카와 호주 일대를 탐사했으며 남극과 북극 지역까지 항해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중국인들은 콜럼버스보다 72년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으며 쿡 함장보다 350여년이나 앞서 호주에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15세기 초반 중국의 항해술과 조선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최근 중국 정부가 정화 함대의 활동을 고증하기 위해 케냐 정부와 공동으로 난파선 수색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로 했다는데,이것이 성공한다면 600년 전 중국의 항해술이 증명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짚고 갈 것이 하나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그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올렸는데 중국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중국은 모든 것이 자급자족 상태여서 외부로부터 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18세기 중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1700년 무렵의 유럽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비슷한 수준에 있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계량경제학적 연구결과는 조금 다르다. 예컨대 영국의 경제학자 앙구스 메디슨에 따르면 18세기 말 영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2000달러 수준이었으며 유럽 국가의 평균은 1500달러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겨우 450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독일의 얀 찬덴은 콥 더글러스 생산함수를 이용해 산업혁명 직전 200년 동안 1인당 GDP가 2배로 증가하는 등 영국이 매우 역동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는 장기 침체에 빠져 있던 중국의 경우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중국이 14세기 이후 이른바 고도의 균형함정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수요가 늘어났는데 대부분의 지주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이나 기계장치 개발 대신 노동력 투입을 늘리는 방편을 택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구가 늘면서 노동가치가 그만큼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또 전근대적인 전통적 기술은 최고 수준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시키기 어려운 한계상황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제는 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일어났는지를 몇 가지만 설명해 보자.우선 장자상속제도를 들 수 있다. 토지가 신분의 원천이 되는 사회에서 토지를 분할 상속하는 대신 장자에게만 상속해 가문의 신분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현금,귀금속 등의 동산을 주어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이들 중에는 돈을 벌어 다시 토지를 매입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주들 중에도 상공업에 투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와 같이 토지자본과 상공업자본이 경계가 없이 넘나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본축적에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프랑스 귀족들은 상공업에 종사하면 귀족 지위를 박탈했다.

두 번째로 영국은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농업혁명과 인클로저로 인해 많은 인구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렸다. 1500년에는 전체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했는데 이 비율이 1700년에는 55%,1800년에는 35%로 내려갔다. 그만큼 값싼 노동력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간 노동일수도 1500년 200일에서 1800년 350일로 늘어나 1인당 노동투입량이 크게 증가했다.

세 번째로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들 수 있다. 석탄,철,납,구리,주석,수력자원 등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산업단지의 지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밖에 정치적 안정,잉글랜드 은행의 역할,식민지의 존재,근대적 노동관 등은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